『달과 6펜스』 vs 『베니스에서의 죽음』 1회
어느 날 문득, 모든 걸 버리고 떠나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매력적인 여자인 데다 남편을 사랑했다. 나는 그들의 삶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골치 아픈 모험에 시달려본 적이 없고, 정직하고 점잖다. 또한 의젓하고 귀여운 두 아이들 덕분에 그들 종족과 계급의 정상적인 전통이 운명처럼 이어지리라는 것도 의심할 수 없었거니와, 그것도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 이런 유형의 삶의 방식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런 삶은, 잔잔한 시냇물이 푸른 초원의 아름다운 나무 그늘 밑으로 굽이굽이 흘러가 이윽고 드넓은 바다로 흘러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바다는 너무 평온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초연하여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 거기에는 잘 정돈된 행복이 있었다. 하지만 내 혈기는 좀 더 거친 삶의 방식을 원했다. 그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기쁨에는 무엇인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는 것 같았다. 내 마음 속에는 더 모험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변화를, 그리고 미지의 세계가 주는 흥분을 체험할 수만 있다면 험한 암초와 무서운 여울도 헤쳐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달과 6펜스』, 민음사, 2009, 36쪽.
어느 날 갑자기,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준비도 없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수 있을까.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든든한 직장과 스위트 홈, 누가 봐도 완벽한 중산층의 안정된 일상. 증권회사의 유능한 중개인이자 모범적인 남편, 사랑스러운 두 아이의 아빠. 찰스 스트릭랜드에게는 그를 신처럼 떠받드는 매력적인 아내가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후속 대책도 없이 가족을 떠난다. 과연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는 어디서도 화가의 재능을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예술가가 되고 싶더라도, 재산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까지 버리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이런 ‘윤리’의 문제를, 가족의 문제를, 나아가 인간의 보편적인 의무의 문제를 초월하는 예술의 욕망을 부각시킨다. 만약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그 어떤 일상의 중력도, 경제적 압박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찰스 스트릭랜드는 믿었던 것일까. 그는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기꺼이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의 길을 택한다. 문화생활은커녕 월세와 끼니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오직 어떻게 하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를 연구한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젊은 작가인 ‘나’의 눈에 비친 찰스 스트릭랜드의 첫인상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너무 무뚝뚝하고 말이 없어 지루해 보이는 사람, 자신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세련된 사교계의 라이프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이 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찰스 스트릭랜드에서 눈부신 광휘가 느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찾았던 것이다.
한편,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이미 최고의 명성을 얻은 예술가의 ‘버리고 떠나기’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최고의 예술가로 명성이 자자한 구스타프 에셴바하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명성을 뒤로하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은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을 숨기고 있는 듯한 그의 숨은 불행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해도, 나 자신이 알고 있다. 나의 영감의 원천이 고갈되어버렸음을. 나의 예술을 계속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안락한 일상을 떠나야 함을. 내가 가진 패가 무엇이든, 때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함을.
미지의 새로움을 동경하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면서 모든 짐을 덜고 모든 걸 망각하고자 하는 충동. 그것은 곧 작품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경직되고 냉정하며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상의 작업장소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 아무도 그가 지칠 대로 지쳐 있다는 걸 몰랐다. (…) 그를 마비시킨 것은 불쾌함에서 오는 일종의 회의적인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무엇에도 만족할 수 없을 듯한 불만감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 이제 와서, 젊은 시절 억압했던 감정이 그를 저버리고, (…) 형식과 표현에 대한 욕구와 열망을 없애버리면서 복수를 하는 것일까? (…) 온 나라의 존경을 받는 동안 그는 자신의 대가다움에 대해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의 작품에는 열렬한 유희적 흥취가 결여된 듯 느껴졌다. 기쁨의 산물이자 내면에 숨겨진 깊은 진실 이상인 그 어떤 것,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면서 세상의 삶을 향유하는 기쁨을 만들어주는 그런 것 말이다.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베니스에서의 죽음』, 민음사, 2009, 423~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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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자음과모음>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시네필 다이어리』,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