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vs 『라 트라비아타』 마지막회
소문 vs 진실의 끝나지 않는 전쟁
드 라몰 저택에서 사람들은 쥘리엥에게 항상 완벽한 정중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낙오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드 라몰의 저택에서 쥘리엥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은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하루가 끝날 때면 그는 흔히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시골에서는 까페의 보이라도 자기 카페에 들어오다가 손님에게 무슨 사고가 생기면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법이다. 그리고 그 사고가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라도 하면, 까페 보이는 동정을 표하면서 귀찮은 말을 열 번이고 되풀이해 늘어놓는다. 그러나 파리에서 사람들은 숨어서 웃으려고 애를 쓴다. 파리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낯선 사람인 것이다.
-스탕달, 이동렬 옮김, 『적과 흑』1, 민음사, 2009, 438쪽.
파리 사교계라는 공통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 두 소설 속에서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우리의 힘없는 주인공 쥘리엥과 마르그리트는 끊임없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적과 흑』, 『라 트라비아타』 속에서는 ‘요란한 소문 vs 숨겨진 진실’이 끊임없이 대비된다. 면전에서는 모두들 우아한 에티켓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척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늘 울고 싶어지는 하루하루. 누군가 참신한 대화를 시작하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사람들, 가정교사를 채용해 놓고서는 ‘새로 구입한 것이 어떠냐’고 묻는 사람들, 그들의 편견을 위협하는 새로운 사상을 증오하고, 통속희곡의 재치있는 대사 이상의 수준으로 대화가 흘러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사람들, 창녀가 죽으면 그녀의 유품 경매에는 관심을 보이지만 그녀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쥘리엥과 마르그리트는 그 아름다운 젊음을 불태우고 죽음의 문턱으로 질주한다.
마틸드는 자신이 속한 계급, 파리 사교계의 삶을 ‘똑같은, 항상 똑같은 뚜껑 속에 갇힌 이집트 미라’처럼 권태로운 삶이라 생각한다. 쥘리엥은 열심히 귀족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흉내 내려 하지만, 좀처럼 성공하지 못한다. 귀족들의 살롱에 참여하는 것만이 출세에 효과적이라는 라몰 후작의 충고를, 쥘리엥은 결국 따를 수 없다. 드 라몰 후작은 애완견을 아끼듯 쥘리엥을 바라보았을 뿐 결코 그를 사윗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라몰 후작은 귀족들의 ‘스캔들 공동체’에서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틸드가 쥘리엥의 아기를 임신하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드 레날 부인은 자신과 쥘리엥의 관계를 폭로해버리고, 세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우여곡절 끝에 자존을 잃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하는 쥘리엥. 그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토록 두려워하던 ‘타인의 시선’을, ‘소문의 눈총’을 떨쳐낸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토록 숭배하던 나폴레옹의 눈치조차 보지 않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분노에 사로잡혀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던 그 여자, 드 레날 부인만이 자신의 죽음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줄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늘 꿈꾸던 위대한 사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소 ‘타인들의 신’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세상 하나뿐인 신’과 만나게 된다.
마르그리트는 ‘소설’ 속에서는 연인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어가지만, ‘영화’에서는 마지막 순간 연인과 화해하고 그의 품 속에서 죽어간다. ‘소설’ 속에서는 그녀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그리워하지도 않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젊은이가 등장한다. 그는 바로 ‘작가’다. 오랫동안 자신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그녀의 흔적을 찾아 파리 골목골목을 뒤지고, 마침내 누구도 몰랐던 그녀의 진심을 세상에 전해주는 것. 그렇게 작가는 문학의 힘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사교계 사람들은 그녀의 유품 경매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입방아’를 찧어대지만, 그녀에 대한 진지한 ‘회상’에 잠긴 사람은 하나도 없다. 파리 최고의 미녀이자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이었던 마르그리트는 빚을 잔뜩 진 채 사망하는 순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연고 시체’가 되어버린다. 그녀의 곁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그녀를 돌봐준 줄리가 아르망에게 편지를 대신 써준다. 그 방은 예전에는 ‘이상야릇한 말들이 오고 간 방’이었지만, 지금은 ‘성스러운 예배당’이 되었다고. 신부님은 숨이 끊어지려는 마르그리트의 손발과 이마에 성유를 바른 후 기도를 올리고, 마르그리트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품 안에 안겨보지도 못한 채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귀족사회의 요란한 소문의 공동체 속에서 결코 용서받지 못한 두 사람, 쥘리엥과 마르그리트는 그렇게 귀족들의 세계에서, 소문의 공동체에서, 삶이라는 터전에서 영원히 추방당한다. 어떤 치욕적인 스캔들도 그들의 귀를 더럽히지 못하는 곳으로, 더 이상 욕심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것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저는 늘 젊어서 죽을 것 같은 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님도 가슴을 앓다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이 남겨준 유일한 재산은 이 병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지내온 생활은 이 병을 악화시킬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지 확실하게 알아주실 때까지는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 아버님은 몹시 구식의 완고한 기질을 가지신 분으로 화류계 여자란 모두가 몰인정하고 몰이해하며 돈을 먹어버리는 기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 아버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그리트. 이건 설교나 위협이 아니고, 내가 머리를 숙이고 부탁하는 것이지만, 어떨까. 지금까지 당신이 내 자식을 위해 해온 어떤 희생보다 좀 더 커다란 희생을 치러줄 수는 없을까?”
이 말에 저는 온몸이 떨렸습니다.
-뒤마 피스, 양원달 옮김, 『춘희』, 신원문화사,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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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자음과모음>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시네필 다이어리』,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