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거울
<적과 흑> vs <라 트라비아타> 9회
그런데 독자여, 소설이란 큰길가를 돌아다니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푸른 창공을 비춰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도로에 파인 수렁의 진흙을 비춰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채롱에 거울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다니! 그의 얼굴이 진흙을 비추면 여러분은 그 거울을 비난한다! 차라리 수렁이 파인 큰길을, 아니 그보다도 물이 괴어 수렁이 파이도록 방치한 도로 감시인을 비난함이 마땅할 것이다.
- 스탕달, 이동렬 옮김, 『적과 흑2』, 민음사, 2004, 162쪽.
소설은 온 세상 구석구석을 은밀하게 염탐하는, 움직이는 영혼의 거울이다. 『적과 흑』의 인물들을, 『라 트라비아타』의 인물들을 ‘속물적이다’라고 비판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에고이스트들의 총집합’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소설들은 말 그대로 ‘우리’의 일상과 욕망과 고뇌를 비추는 움직이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소설 속의 인물들을 비판하고 분석할 때, 우리는 어느새 우리 자신의 치부가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소설이 뉴스와 다른 점은, 세상을 비추는 마음의 카메라가 ‘직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영혼의 거울은 일그러지고, 깨지고, 삐딱한 시선으로, 명명백백한 팩트(fact)만으로는 건널 수 없는 현실의 늪을 비춘다.
『적과흑』에서 쥘리엥은 드 레날 부인의 순수와 보살핌의 공간으로부터 탈주하여 마틸드의 허영과 권태와 성공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쥘리엥은 귀족들의 세계, 부자들의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그들과 진정으로 섞이지 못하는데, 바로 이 점이야말로 쥘리엥의 신비한 매력이기도 했다. 오직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사람들은 쥘리엥에게서 ‘속물의 비위를 거스르는 그 무엇’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어떤 번뜩임’을 읽어낸다. 쥘리엥과 드 레날 부인과의 관계는 마음은 무한대로 뻗어나가지만 행동은 한없이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비해 쥘리엥과 마틸드와의 관계는 마음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즉 행동의 그럴 듯함을 추구하느라 마음의 상태를 돌보지 못하는 관계였다. 쥘리엥은 마틸드와는 ‘소설 속에서 나오는 듯한’ 멋진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그녀에게서 마음의 안식을 얻지는 못한다. 하지만 쥘리엥은 마틸드와의 결혼을 결코 양보할 수 없다. 그녀와의 결혼은 ‘성공’으로 가는 열쇠, 즉 보나파르트처럼 이 세상 밑바닥에서 이 세상의 클라이막스로 비약하는 길로 보였던 것이다.
『라트라비아타』의 아르망 또한 마르그리트에게서 얻었던 무한한 안식을, 오랑프에게서는 결코 얻지 못한다. 오랑프와의 계약 연애는 마르그리트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음모임을, 아르망도 마르그리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망의 순수한 열정은 옹색한 질투로 변해버렸고, ‘어떻게 하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까’라는 화두는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불행하게 해줄까’라는 음모로 바뀌어버린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고 용렬한지 알면서도 그녀를 향한 저주를 멈추지 못한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친구 오랑프와 연인이 되어버린 아르망을 바라보며 새파랗게 질린다. 그녀의 병세는 더욱 짙어진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플 때마다 자신이 더욱 아파했던 한 남자의 아름다운 영혼이 사라져버렸기에. 오랑프를 돈으로 매수하고, 그녀를 ‘전형적인 창부’로 취급하는 모습을 보란 듯이 연출하면서, 아르망은 마르그리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힌 것이다.
그날 이래, 나는 마르그리트에 대해 기회만 있으면 온갖 박해를 가했습니다. 오랑프와 마르그리트는 절교하고 말았습니다. (…) 나는 새로운 연인에게 마차와 보석을 사주었습니다. 나는 도박을 했고, 오랑프 같은 여자의 연인에 걸맞게 온갖 어리석은 짓을 도맡아 했습니다. 이 새로운 사랑의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프류당스까지도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내가 마르그리트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내가 그런 짓을 하는 동기를 꿰뚫어보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속아버렸는지, 내가 매일매일 어김없이 가하는 모욕에 대해 매우 침착한 응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역시 괴로워하고 있는 모양으로, 어디서 만나도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하고 음울해져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랑했던 까닭에 미움은 백배 천배 더해져, 나는 마르그리트의 나날의 고통을 바라보고 남모를 쾌재를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뒤마 피스, 양원달 옮김, 『춘희』, 신원문화사, 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