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모두, 적(敵)이다
나는 감동하기 쉬운 마음을 가졌다. 아무리 진부한 말일지라도 진실한 어조로 말해지면 나의 목소리를 떨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메마른 마음의 소유자들은 이 결함 때문에 얼마나 자주 나를 경멸했던가.
-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적과 흑 2??, 민음사, 2009, 123쪽.
그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을 거야. 아무도 나의 고결한 영혼을 이해해주지 못하지. 세상은 온통 적으로 가득 차 있어. 쥘리엥의 마음속에는 저 험한 세상 속에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과 이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공존한다. 부모의 사랑도 형제의 사랑도 친구의 우정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쥘리엥. 그는 항상 공격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드 레날 부인이 그저 “라틴어를 아세요?”라고 물었다는 이유로,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부인은 그저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었을 뿐인데 말이다.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도 그는 날카로운 공격의 기미를 느낀다. 쥘리엥은 그가 알고 있는 누구보다도 라틴어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지식 없이는 자존을 지킬 수 없는 쥘리엥. 그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가 지식이라 생각한다. 격의 없이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모르기에, 자기 안으로만 침잠하면서 오직 ‘책’ 속에서만 위안을 찾는 것이다. 인생을 직접 체험하며 배운 ‘삶’의 지식이 부족하기에, ‘책’만으로 배운 지식은 그에게 영혼의 피와 살이 되지 못한다. 그는 지식은 풍부하지만 지혜는 일천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의 방대한 지식은 끝내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
쥘리엥은 쉽게 상처 입는 만큼 감동도 쉽게 잘 받는다. 손쉽게 감동받는 성격이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움직이기 쉬운 마음’이 그의 핸디캡이지만, 드 레날 부인에게는 그른 쥘리엥의 결점이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오직 ‘돈을 벌 수 있는가’가 행동의 기준인 남편 드 레날 씨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던 반면, 쥘리엥은 세상 모든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질 때만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쥘리엥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준비’ 자체가 되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 드 레날 부인의 손을 잡는 로맨틱한 행동조차도 ‘결투’의 시간을 기다리는 ‘군인’의 긴장처럼 경직된 미션일 뿐이었다.
『춘희』의 아르망 또한 오직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느라 마르그리트를 비롯한 ‘타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저 자기만의 감정에 빠져 마르그리트를 소유하기만을 바랐던 그는 사람의 행동 뒤에 가려진 진의를 읽어내는 깊이 있는 눈길을 지니지 못한 것이다. 아르망의 아버지를 만나고 난 후 패닉 상태에 빠진 마르그리트가 어쩔 수 없이 작별의 편지를 쓰고 떠나자, 아르망은 마르그리트의 진심을 읽어내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아무리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도, 제발 자신을 잡아달라는 마르그리트의 반어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아르망은 ‘삐뚤어지기로’ 결심한다. 아버지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자신을 속이고, 마르그리트도 자신을 속였으니, 세상 모두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느낀 아르망은 이제 타락의 길로 빠지기로 결심한다. 마르그리트에게 복수하기 위해, 마르그리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어떤 야비한 일도 서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버님 계신 데로 돌아가세요. 아르망님, 우리의 비참함 따위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청순한 누이동생을 만나러 가세요. 그러면 마르그리트 고티에라 불리는 윤락 여성 때문에 괴로워하신 일도 금방 잊으실 겁니다. 순간의 일이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많이 사랑해주셨어요. 덕분에 일생에 단 한 번의 행복한 시기를 지낼 수 있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이 일생도 길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미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일순 나는 정말 길가에 쓰러질 듯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관자놀이가 펄떡펄떡 뛰었습니다. 간신히 조금 침착을 되찾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보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내 불행에 의하여 정지당하지도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 뒤마 피스, 양원달 옮김, 『춘희』, 신원문화사, 1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