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솔직한 그, 그리고 그녀
제 이름은 쥘리엥 소렐입니다. 부인. 저는 난생 처음 낯선 집에 들어오게 돼서 떨리기만 합니다. 저는 부인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많은 일을 너그럽게 보아주세요. 저는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도 다녀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군의이며 레종 도뇌르 훈장 수훈자인 저의 사촌과 쉘랑 신부님 이외에는 다른 사람과 말을 섞어본 적이 없습니다. 쉘랑 신부님은 저에 관해 잘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제 형들은 언제나 저를 때리기만 했지요.
- 스탕달, 이동렬 옮김, 『적과 흑』, 민음사, 2009, 244쪽.
자기소개를 요구받는 순간, 현대인들은 뭔가 최대한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될 수 있는 한 멋있는 멘트로 바람직한 첫인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와 처음 마주치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한 아무 사전 정보가 없는데도, 그 사람에게 내 모든 약점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증명하는 길일지라도? 『적과 흑』에서 쥘리앙 소렐은 드 레날 부인에게 정말로 그렇게 한다. 위 장면은 『적과 흑』에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서글프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귀엽고 유머러스한 장면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가 토마스 앞에서 ‘꼬르륵’ 소리를 숨기지 못했던 것처럼. 배고픔의 신호인 꼬르륵 소리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와 테레사가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동안, 토마스는 그런 테레사에게 참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드 레날 부인도 마찬가지다. 사람들 앞에서 세련되고 우아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법을 알지 못하는 최초의 인간을 그녀는 마주한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 사람들은 ‘안녕하세요, 저는 어디서 온 누구누구입니다.’ 이상의 정보를 상대방에게 의도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첫인사에서부터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버린다는 것은 전투에서 무장해제한 채로 적에게 노출되는 것과 진배없는 ‘처세술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쥘리엥은 천진한 나머지 이런 상식적인(?) 관계의 기술도 알지 못한다. 드 레날 부인을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 자기 인생의 아킬레스건, 자기 인생의 트라우마, 자기 인생의 당면 과제를 빠짐없이 낱낱이 고백해버린 것이다. 드 레날 부인은 낯선 여인 앞에서 쩔쩔매는 쥘리엥에게서 이전의 어떤 남성에게도 발견하지 못했던 무구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이 서로에게 발견하는 희망도 바로 이런 숨길 수 없는 투명함, 순진함, 무구함이다. 파리 사교계가 아무리 속물들의 천국이라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사랑 앞에서조차 계산기를 두드리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의 품 안에서라면 세상을 아랑곳 않은 채 사랑 그 자체에 집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사치와 방탕의 기운이 가득한 파리를 떠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그들의 사랑에 완전히 집중하기로 한다. 항상 뭇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살아오던 마르그리트는 처음으로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는 시골 사람들의 무리 속에 섞여 ‘보통 여자’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교계의 광풍이, 부모님의 속물근성이, 화류계의 욕정이 틈입할 수 없는 완벽한 전원풍경 속에서 두 사람은 오직 서로의 시선 안에서만 깨어 있고 서로의 팔 안에서만 잠들어 있기로 한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마크 왕의 시선을 피해 달아난 낙원처럼. 오디세우스를 숨겼던 칼립소의 낙원처럼. 아무리 오래 머물러 있어도 사랑이 끝나버리면 ‘찰라’에 불과한 그 일시적 낙원의 풍경 속으로.
만일 당신 또한 누군가를 사랑한 경험이 있으시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었다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살아가려는 상대방을 이 세상에서 떼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보셨을 겁니다. (…) 다른 사람들 속에 섞이면 사랑하는 여인의 향기도, 순수함도 잃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 파리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가면, 예전의 이 여자의 단골이나, 또한 내일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남자와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골에 오면 주위에는 본 적도 없거니와 우리들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들뿐입니다. (…) 도시의 소란을 피해, 나는 연인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수치도 무서움도 없이 사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화류계 여성의 티는 조금씩 사라져갔습니다. 내 옆에 있는 것은 젊고, 아름답고, 서로가 사랑하고 있는 마르그리트라고 부르는 여인입니다. 과거는 형태를 잃고 미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 뒤마 피스, 양원달 옮김, 『춘희』, 신원문화사, 94~9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