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vs <라 트라비아타> ⑤
스노비즘: 더 높이, 더 많이, 더 크게
왕위 찬탈자를 공공연히 증오하는 사람의 집에서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숨기고 있는 것이 발각되다니! 쥘리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더구나 그처럼 지독한 왕당파이며 또 그토록 성나 있는 드 레날 씨에게 발견되다니! 경솔하기 짝이 없게 초상화 뒷면 백지에는 내 손으로 글귀까지 적어놓았으렷다! 내 나폴레옹 숭배열을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내는 글귀를! 그 숭배의 열정 하나하나에는 날짜까지 적혀 있지 않은가! (…) 내 평판은 모두 순식간에 무너지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 평판은 내 전 재산이다. 나는 오직 평판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데…….
-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적과 흑』, 민음사, 2009, 100쪽.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않을 만한 자리로, 드높이 올라가고 싶은 욕망. 세상의 변두리에서 세상의 중심을 향해 돌진하고 싶은 욕망. 오직 그것만이 쥘리엥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가 나폴레옹을 남몰래 숭배하는 것도 바로 나폴레옹의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와 무관하지 않다. 오직 타인의 평판, 그것만이 그의 전 재산이다. 세상 저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남의 집 가정교사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다. 드 레날 부인을 향한 쥘리엥의 마음 또한 이 지독한 상승의 욕구의 연장선상이다. 드 레날 부인을 유혹함으로써 자신의 속물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쥘리엥의 계략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한다. 드 레날 부인은 쥘리엥이 해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황홀감을 느낀 나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쥘리엥은 지금,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혹시라도 타인이 자신을 무시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단 하루,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드 레날 씨가 호통을 치자 쥘리엥의 자격지심은 폭발한다.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감히 나를 드 레날 부인이 보고 있는 앞에서 멸시하다니. 드 레날 씨를 천박한 졸부로 바라보는 쥘리엥의 시선에는 부자들을 향한 무조건적인 적대감도 숨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월등히 앞선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그를 사로잡고 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조차 미래에 자신을 멸시할 계급의 잔당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의 ‘드높은 마음’은 그의 ‘비천한 신세’로 인해 더욱 심하게 상처 입는다.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세속적 성공을 향한 맹목적 욕망, 즉 스노비즘(snobbism)이 자리 잡고 있다.
마르그리트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시작한 아르망은 이제 오직 사랑의 길만이 구원의 길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는 돈이 필요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기 위해서는. 생활고를 겪던 마르그리트는 급기야 아르망 몰래 자신의 보석들과 마차, 값비싼 옷까지 팔아넘기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아르망은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유산을 마르그리트를 위해 쓰기로 한다. ‘돈 문제’가 걸리자 아르망의 아버지 또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아르망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창부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아들에게 남겨줄 유산이 창부를 위해 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기함한다.
아르망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두 사람이 헤어지기를 바란다. 아르망의 아버지는 아들이 최고의 성공을 맛보길 바란다. 아르망과 마르그리트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는 알 바 아니다. 아르망 부친의 태도가 우아하고 격조 높을수록 마르그리트의 마음에 새겨지는 상처는 더욱 끔찍해진다. 그는 아주 신사다운 풍모로 ‘창부’ 마르그리트를 매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르망의 아버지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내 아들의 격조 높은 삶’이지만 그의 몸을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욕망은 노골적인 스노비즘이 아니었을까. 더 높이 올라가고, 더 크게 성공하고, 더 많이 세상을 가지고 싶은 마음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아버님, 창녀들을 귀양 보내는 상트 마르그리트 섬은 이미 없어요. 또 가령 있다고 해도, 어떤 일이 있어도 여자를 귀양 보내겠다면 저는 거기까지 마드모아젤 고티에를 따라가겠습니다. 할 수 없어요. 그 여자의 연인으로 살 수 없다면 저는 절대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 “아르망. (…) 그 여자와 손을 끊어. 아버지가 이렇게 사정하고 있잖아! (…) 벌써 스물네 살이나 되었는데 장래도 생각해라. 그 여자를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도 없는 거고, 그 여자도 너를 언제까지나 사랑하지는 않아. 둘 다 자기들의 사랑을 과장해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출세의 길을 서로가 막고 있는 거야.”
- 뒤마 피스 지음, 양원달 옮김, 『춘희』, 신원문화사, 1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