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vs 『라 트라비아타』③
욕망의 마지노선을 넘는 순간
드 레날 부인은 돈만 아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직 익숙해질 수 없었다. 하지만 부인은 그들 가운데서 살아야 했다. 나이 어린 시골뜨기 쥘리엥의 성공은 거기에서 연유되었다. 이 고상하고도 자존심 강한 영혼과의 교감 속에서 그녀는 새로움이 갖는 매력의 감미롭고 찬란한 기쁨을 발견했던 것이다. 드 레날 부인은 자기가 고쳐줄 수 있었던 쥘리엥의 거친 태도와 또 하나의 매력으로 보이는 그의 극도의 무지를 진작부터 용서해주었다. (…) 너그러움, 영혼의 고귀성, 인간미 같은 것이 그녀에게는 점차로 이 젊은 사제에게만 존재하는 듯이 보였다. 이러한 미덕이 고상하게 타고난 영혼에 불러일으키는 모든 공감과 찬탄을 그녀는 오직 한 사람에게서만 느꼈다.
-스탕달, 이동렬 옮김, 『적과 흑』, 민음사, 2010, 65~66쪽.
사랑과 우정 사이, 연민과 사랑 사이에는 수많은 교집합이 있다. 사랑과 우정 사이, 연민과 사랑 사이에는 본래 ‘애매한 경계’가 있다기보다는 그 경계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사랑과 우정 사이, 사랑과 연민 사이. 이 사이에는 ‘멈출 수 없는 욕망’과 이를 멈추려는 의지의 브레이크 사이의 전쟁이 있다. 이것은 전면전이다. 적당히 ‘우정’의 외피로 덮어 버리고 ‘사랑’이라는 본심을 숨길 수 있는 타협점이란 없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혹은 없어야만 하는) 타인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연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순간, 사랑은 이미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드 레날 부인은 쥘리엥을 향한 연민을 통해 비로소 자신도 모르던 자신을 발견한다. 드 레날 부인은 자신이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믿었던 생활이 얼마나 속물적 욕망으로 가득 찬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이 ‘전부’라고 믿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쉽게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도.
욕망의 자발적 마지노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10년 전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자. 그때 내 욕망의 마지노선은 어디쯤이었는가. 어느 정도의 월수입과 어느 정도의 자유를 원했는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자. 그 욕망의 갭은 얼마나 심각하게 벌어져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10년 전에 내가 원했던 나’가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나 자신’에게 만족하느냐고 물었을 때는 세차게 도리질할 것이다. 저마다의 자아는 10년 전의 내가 원했던 나, 그 ‘꿈’이라는 보이지 않는 소비자의 니즈(needs)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20년 후, 30년 후에는 더 심각한 욕망의 갭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욕망의 증가 곡선은 물가 상승률만을 참조하지 않는다. 욕망은 천정부지의 복리(더 큰 만족)로 증가하며, 천문학적인 이자(다음 기회의 또 다른 만족)를 필요로 한다.
욕망은 고정된 그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를 원한다. ‘좀 더, 조금만 더’에서 ‘좀’이나 ‘조금만’은 ‘소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멈출 수 없음’을 나타내는 표지다. 그 어떤 만족 앞에서도 ‘좀 더’를 원할 테니. 그리하여 욕망이라는 이름의 아우토반 위에서는 브레이크가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라 트라비아타』의 아르망과 마르그리트 또한 좀처럼 멈출 수 없는 자신들의 욕망을 발견한다. 아르망은 사치와 허영에 찌든 마르그리트의 삶을 바꿔보려 하지만, 도저히 그녀를 바꿀 수 없다. 그는 그녀를 변화시키겠다는 계몽의 의지를 꺾고, 비로소 결심한다. 그녀를 바꿀 수 없으니, 차라리 ‘나’를 바꾸기로. 그녀의 삶을 나에 맞게 성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그녀에게 어울리도록 전면적으로 조율하기로. 설사 그 길이 혼란과 파멸을 재촉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그때부터 나는 여자의 생활을 변경시킬 수 없어서 나 자신의 생활 쪽을 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몹시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평온한 내 생활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고 단정치 못해졌습니다. 아무리 이익을 탐내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화류계 여자입니다. (…) 꽃이다, 연극이다, 식사다, 유람이다 하고 (…) 돈이 드는 걸로 말하면 말도 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 말할 것도 없이 살림살이는 아무래도 화려해졌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마음이 변하기 쉬운 성품으로 향락을 좇으면서 돈 문제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여자였습니다. (…) 내가 데리고 나가 점심을 같이하고, 극장에 가고, (…) 이런 식으로 하룻밤에 사 루이나 오 루이 드니까 그러면 한 달에 이천오백이나 삼천 프랑이 올라가고, 내 수입로서는 삼 개월 반밖에 지내지 못합니다. 결국 빚을 얻거나 헤어지거나 하는 막판에까지 몰렸던 것입니다.
-뒤마 피스, 양원달 옮김, 『춘희』, 신원문화사, 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