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vs 『1984』 마지막회
비극적 유토피아, 희극적 디스토피아
“이제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네. 그러니까 덕성의 반은 적어도 병 속에 지참하고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야.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기독교 정신을 터득하는 것. 그것이 소마의 본질일세.”
“하지만 눈물은 필요한 것입니다. 오셀로의 말을 기억하시죠? 만일 폭풍이 지난 후 이러한
평온이 찾아오는 것이라면 사자(死者)의 눈을 뜨게 할 때까지 바람아 부소서라는 대목
말입니다. 인디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마타스키의 소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소녀와 결혼하고 싶은 청년들은 소녀의 집 정원에서 한나절
동안 호미질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 같았지만 뜰에는 파리와 모기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마법의 파리와 모기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청년들은
물리고 찔리는 아픔을 참지 못했지만, 참고 견딘 청년이 있어서 그 소녀를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멋있는 이야기야! 하지만 문명국에서는”
총통이 말했다. “여기서는 호미질을 하지 않고도 여자를 얻을 수 있네.”
-올더스 헉슬리, 이덕형 옮김,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302쪽.
눈물이 없는 세계는 행복할까? 물론, ‘행복은’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복에 완전히 만족할 수 있을까. 멋진 신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질적인 존재, 야만인 존은 눈물 없는 세계, 비극 없는 세계, 저항 없는 세계를 신뢰하지 않는다. 눈물이 없는 세계는 곧 슬픔을 통제하는 사회이며 감정의 ‘과잉’을 용납하지 않는 세계다. 그 감정의 과잉 혹은 잉여야말로 이야기의 원천이며 저항의 원천이고 나아가 예술의 원천이 된다. 야만인 존은 어떤 고등교육도 받은 적이 없지만 소마에 중독되지 않은 희귀한 인간이었기에 본능적으로 ‘눈물’의 소중함을 격렬하게 옹호한다. 멋진 신세계는 첨단과학의 진보를 집대성한 도시로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가장 보수적인 욕망을 구현하는 ‘정지된 세계’였던 것이다. 강한 자는 대대손손 더욱 강하게, 약한 자는 시종일관 더욱 약하게. 이런 사회에는 어떤 새로운 꿈도, 어떤 새로운 사랑도 시작할 수 없다. 야만인 존은 그 멋진 신세계의 행복을 거부하고, 고통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사랑과 혁명의 길을 걸어가려 한다.
<멋진 신세계>가 비극적 유토피아라면, 『1984』는 희극적 디스토피아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만인이 일괄적으로 행복을 느끼도록 프로그래밍되지만 그 행복이 과학과 정치의 이름으로 통제됨으로써 인류의 삶 전체가 끔찍한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1984』에서는 ‘빅 브라더가 모든 자를 감시한다’는 것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디스토피아이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딘가 희극적인 자기 파괴의 몸짓을 보여준다. 두 가지 세계 모두 본질적으로 ‘역사의 삭제’이자 ‘감정의 파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비극이다. 이 두 작품은 아무리 아름다운 비전으로 치장한 세계라도, 아무리 대단한 진보의 논리로 무장한 세계라도, 그것이 ‘계산 가능한 세계’라면 인간의 본성을 파괴할 수밖에 없음을 뼈아프게 증명한다.
<멋진 신세계>와 『1984』에서 묘사한 인류의 비극적 미래가 그때보다 훨씬 ‘현실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가와 있는 지금. 인류의 ‘전체적인’ 재화, 과학의 ‘전체적인 진보, 문화의 ‘전체적인 ’대중화 지수는 분명 증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의 ‘평균’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이 설사 평균에 가까운 문명의 분배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혹은‘바람직한’ 것일까. 어쩌면 인류에게 다가올 가장 불행한 미래 중 하나는 단지 자원의 부족이라든지 기후의 대격변, 자연의 대재앙 같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 나아가 새로운 꿈을 꿀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소수자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멋진 신세계』와 『1984』가 머나먼 미래의 상상적 이미지라든가 오래된 고전의 케케묵은 논리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적인 그 무엇’으로 느껴진다. 읽으면 읽을수록 미래 사회의 ‘그들’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상상의 리포트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문명 전체의 고통스런 엑스레이 사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는지 아는가, 윈스턴?" 윈스턴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으로요.” 그가 드디어 대답했다. “바로 그거야. (…) 권력은 결국 고통과 수치심을 가함으로써 행사되는 것이라네. 권력은 인간의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모양으로 다시 맞추는 것이라네. 자네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창조하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나? (…) 우리의 세계에서 발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가하는 방법의 발전일 것일세. (…) 우리의 건국은 증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네. 우리의 세계에는 공포, 분노, 승리 그리고 자기 비하 외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아. 우린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일세. 모두 말이야. (…) 우리는 자식과 부모 사이에, 남자와 남자 사이에,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형성된 연결고리를 잘라버렸어. 이제는 그 누구도 아내를, 자식을, 친구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네. 미래에는 아내도, 친구도 없을 것이야.
-조지 오웰, 이기한 옮김, <1984>,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3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