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vs 『1984』 ⑥
네트워크를 금지하라
그들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첫 번째 사실은 야만인과의 육체 관계가 어떠한 것이냐 하는 것이야.
그래서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어. ( …… ) 야만인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 사람은 나를 피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한다니까. 내가 들어가면 그는 그냥 방을 나가버리거든. 나를 건드려보려고도 하지 않아.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해. 그러다가 내가 갑자기 뒤돌아서면 그가 나를 응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니까. ( …… ) 갈수록 그가 더 좋아졌다. 이제 좋은 기회가
왔다고 레니나는 생각했다. 목욕을 하고 나서 그녀는 몸에 향수를 뿌렸다.
-올더스 헉슬리, 이덕형 옮김,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1998, 209~210쪽.
연애 없는 사랑과 사랑 없는 연애 중에서, 오직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멋진 신세계에서는 오직 ‘사랑 없는 연애’만이 권장된다. 사랑이란 위험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타자를 향한 관계 맺음의 욕구이고, 그 타자지향성이야말로 멋진 신세계의 지배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 맺으려는 욕구 자체에 혁명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관계를 맺으면 이야기하고 싶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이 세계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깨달을 테니까. 그런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 존은 처음으로 ‘사랑’을 꿈꾼다. 육체적 관계는 허락되지만 ‘사랑’이 금지된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은 처음으로 ‘사랑’을 꿈꾼다. 레니나를 향한 그의 마음은 셰익스피어를 향한 그의 열정처럼 금지된 열정이었고, 은밀한 낭만이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레니나는 야만인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레니나는 오직 그와의 육체적 관계만을 꿈꾸는 것이다. 레니나는 자신이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임을 알지 못한다. 사랑이란 감정이 억압되고, 남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죄악시된 멋진 신세계에서 레니나는 오직 많은 남자와의 자유로운 육체적 관계만을 건조하게 맺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레니나 앞에서 야만인은 ‘사랑’을 말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야만인, 그녀에게 말 한 마디 하는 것조차 세상 전체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이나 힘겨워하는 야만인. 그의 눈빛에 담긴 수줍은 진실을 레니나는 알아보지 못한다.
레니나는 야만인이 다른 남자들처럼 형식적이고 육체적으로 자신에게 대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야만인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레니나를 설득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자신이 자라온 ‘야만인의 마을’ 멜파이스에서는 어떤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남자는 들사자의 가죽을 가져와야 한다고 말한다. 사자가 아니라면 늑대라도 가져와야 한다고. 레니나는 쏘아붙인다. “영국에는 사자가 없는 걸요.” 야만인은 당신을 위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건 싸움을 시작하고 싶은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레니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레니나는 야만인을 향해 소리친다. “그런 건 엡실론 세미 모론 계급이나 하는 일이예요!”
『1984』에서 사랑에 빠진 윈스턴과 줄리아는 처음으로 ‘둘’이라는 친밀한 네트워킹을 시도한다. 줄리아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향수를 뿌리고 하나가 아닌 둘로서 살아가기. 그것은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누군가의 체온이 내 몸에 느껴진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 단지 ‘밤’이 아닌 ‘아침’을 맞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윈스턴과 줄리아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가 우리 모두를 감시하기 이전’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해본다. 그들도 이랬을까. 누군가를 보고 싶으면 만나고, 만나면 키스하고 포옹하고 사랑을 나누고, 아침에는 졸린 눈을 비비며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연인을 바라보며 흐뭇함을 느끼는 일. 그 모든 ‘일반인’들이 이런 커다란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모든 행위가 금지된 사회에서 처음으로 지켜주고 싶은 타인, 함께 하고 싶은 타인, 놓치고 싶지 않은 타인을 만난 것이다.
“이제 돌아봐도 괜찮아요.” 줄리아가 말했다.
그는 돌아섰지만 한동안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 그녀의 변신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녀는 화장을 한 것이다. (…)그는 화장을 하고 있는 여자 당원을 과거에 보거나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 적소에 적절한 색깔을 조금 가함으로써 그녀는 더 예뻐졌을 뿐 아니라 더 여성적이 되었다. 그녀의 짧은 머리와 남성적인 작업복은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부각했다. 그는 그녀를 껴안는 순간 인공의 바이올렛 향기가 그의 코를 메웠다. (…) 그들은 옷을 다 집어던지고 큰 마호가니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창백하고 볼품없는 몸을 몹시 부끄러워했었다. (…) 사라져버린 과거에는 서서히 시원해지는 여름 저녁에 남녀가 옷을 입지 않은 채 침대에 마냥 누워 있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는지 그는 궁금해졌다. 원할 때 사랑을 나누고, 원할 때 이야기를 나누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평온한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마냥 누워 있는 것 말이다. 이러한 것이 일상적인 때가 정말 있었을까?
-조지 오웰, 이기한 옮김, 『1984』,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99~2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