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vs 『1984』 ④
금지된 열정, 질주하는 욕망
"자네는 지금까지"하고 헬름홀츠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자네의 내부에 무엇인가 숨어 있어서 자네가그것을 끄집어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느껴본 적 없나? 자네가 사용하지 않고
있는 여분의 힘과 같은 것 말일세. 그러니까 터빈 속을 통과하지 않고 폭포로 그냥 떨어지는 물과 같은 것 말야. (…) 무언가 내가 이따금 느끼는 야릇한 감정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무언가 내가 이야기할
중대한 것이 있고 그것을 표현할 능력도 있다는 기분이야. 단지 그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데다가 그 능력을 도무지 사용할 수가 없다는 감정이야. (…) 무언가 훨씬 중요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보다 강렬하고 보다 격렬한 것 말야. 그런데 그것이 무엇일까?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1998, 72쪽.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못 견디게 ‘그것’이 하고 싶다. 이렇게 설명하기 어려운 강렬한 충동을, 버나드와 그의 친구 헬름홀츠는 자주 느낀다. 문학과 예술과 사랑 자체를 금지하기 위해 그것과 관련된 모든 교육을 금지한 ‘멋진 신세계’. 심지어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즉각 ‘증오’하도록 조건반사훈련을 받은 이 도시에서, 알파 계급의 최고 엘리트들인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아름다운 것들을 열망하기 시작한다. 버나드는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버나드는 의미 없는 섹스가 아닌 낭만적 사랑을 꿈꾸기 시작했다. 헬름홀츠는 문학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기계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읽는 사람들의 영혼을 관통하는 그 무언가를 쓰고 싶어한다. 사랑과 예술은 물론 역사와 혁명이 금지된 곳, 아니 처음부터 그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도 없는 곳. 그곳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셰익스피어나 성경뿐 아니라 ‘역사’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텍스트가 금서인 세계. 헉슬리가 창조한 ‘멋진 신세계’는 무엇보다도 ‘역사’가 사라진 세계다. 역사가 없기에, 문학과 예술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전통과 창조가 사라진 이곳에서 사람들은 오직 ‘현재의 쾌락’만을 생각하도록 길들여진다. 주어진 노동을 소름끼치도록 충실히 이행하고, 남는 시간에는 미친 듯이 각종 엔터테인먼트로 전력질주하는 것이다. 어쩐지 현대인을 많이 닮지 않았는가. 문학과 예술이 사라진 대신 각종 레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최고 수준으로 발달한 사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곳은 확실히 유토피아다. 그러나 버나드와 헬름홀츠의 불안과 우울은 최첨단 엔터테인먼트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버나드는 행복의 약속, ‘소마’를 멀리하려 한다. 소마에 취하면 고도의 지적 활동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더 고통스럽게 고뇌하기 위해, 마약을 끊듯이 힘겹게 소마를 끊으려 한다. ‘멋진 신세계’ 시민들은 ‘뭔가 이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에는 소마 1그램을 들이키면 된다. 소마를 투약하는 순간 우울도, 불안도, 공포도 사라진다. 소마는 정신의 여백을 삭제하는 영혼의 마취제다.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혁명과 저항과 진보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조작과 위조와 투항의 동력이기도 하다. 윈스턴은 ‘당일명령’ 임무수행차 ‘오길비’라는 가짜 영웅을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글쓰기 능력에 감탄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만들지 못해도 죽은 사람은 만들 수 있다고. 윈스턴은 ‘일기 쓰기’를 통해 ‘이 세계가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그의 훌륭한 글쓰기 능력은 빅 브라더의 연설문을 보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도록 수정하는 데도 쓰일 수 있다. 윈스턴은 임무수행을 위해 날조된 영웅 ‘오길비’를 자신의 글쓰기 하나로 순식간에 급조해내며 스스로의 능력에 감탄한다. 글쓰기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 영웅을 만들 수 있다니. 당의 핵심 멤버였던 위더스는 당의 눈밖에 나서 실종되었고, 그는 ‘무인’으로 처리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게 살아움직였던 한 인간은 ‘기록의 저편’으로 사라짐으로써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 되어버렸고, 윈스턴이 글쓰기로 급조해낸 ‘오길비’라는 가짜 영웅은 ‘기록의 대상’이 됨으로써 실체 없이도 얼마든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돌연 윈스턴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마치 미리 준비한 듯한 오길비 동무라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오길비는 영웅적인 상황에서 전투 중에 사망한 병사였다. 빅 브라더는 당일 명령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귀감이 될 만한, 특정한 낮은 지위를 가진 일반 당원의 삶과 죽음을 부각시키곤 한다. 오늘 그는 오길비를 추모할 것이다. 물론 오길비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류상의 몇 줄과 가짜 사진 몇 개면 그를 실존 인물로 만들 수 있다. (…) 오길비는 금주와 금연을 생활화했으며 체육관에서 매일 한 시간씩 운동하는 것 외에는 여가 활동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결혼 생활에 충실하고 가족을 돌보게 되면 24시간 동안 당에 헌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금욕 서약’을 자청했다. (…) 불과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오길비 동무라는 인물이 이제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지 못해도 죽은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놀랍기만 하였다. 현재에 존재한 적이 전혀 없는 오길비 동무는 이제 과거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조지 오웰, 『1984』,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81~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