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vs 『1984』 ③
이것이 ‘진보’인가
자, 이것이 바로 진보라는 것이야. 노인도 일하며 노인도 이성과 교합하며 노인에게도 시간이 없게
되었지. 쾌락으로부터 벗어날 여가가 없으며 잠시도 앉아서 생각할 시간이 없어졌지. 또한 불행히도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미한 시간의 터널이 입을 벌린다면 항상 소마가 대기하고 있는 거야.
유쾌한 소마가 있지. 주말에는 반 그램, 휴일에는 일 그램, 호사스런 동방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이 그램, 달나라의 영원한 암흑 속에서 잠자고 싶으면 삼 그램.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1998, 72쪽.
그곳은 한 개의 수정란으로 96명의 인간을 수정하는 것이 ‘진보’라 믿는 사회다. 인간의 탄생을 포드주의의 생산물로 탈신비화시키는 곳. 이곳에서는 탄생의 축복과 신비가 사라지고, 인간이 공장의 생산품으로 대체되어버린다. 지배자들은 인간의 개별성을 삭제하고 우연이나 자율성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소화한 사회가 최고로 ‘안전한 사회’라 믿는다. 태교는 물론 교육과 일상 전체가 철저히 통제되는 곳. 모든 아이들은 똑같은 태교, 똑같은 교육, 똑같은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멋진 신세계는 아름다운 것을 ‘쓸모없다’며 혐오하도록 가르친다. 아름다운 시(詩)도, 아름다운 음악도, 아름다운 문학도 사라진 곳에서 사람들은 오직 감각적 쾌락에 탐닉한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무의식까지 강력하게 통제된다. ‘수면시 교육법’은 수면 중의 무의식까지 지배하려는 영혼 통제 프로젝트다.
이곳의 아이들은 계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급감정’을 배운다. 아이들은 계급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급별 ‘구별짓기’라는 이데올로기를 습득한다. 알파 계급에서 엡실론 계급까지, 높은 계급은 한 계급이라도 낮은 계급을 멸시하고 증오하고, 낮은 계급은 높은 계급을 경외하고 숭배한다. 그리고 이 모든 욕망의 통제 시스템 최상부에는 ‘국가’가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과거의 유물, 과거를 향한 애착, 과거의 냄새를 풍기는 모든 것이 억압당한다.
인류를 인류답게 만드는 그 모든 역사의 흔적을 먼지를 털듯 손쉽게 삭제해버리는 곳. 무한한 육체적 쾌락이 존재하는 대신 무언가를 창조하는 기쁨, 무언가를 가꾸고 보살피는 기쁨이 사라진 곳.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찌든 버나드는 이 멋진 신세계에서 뭔가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는 아무리 무한한 쾌락을 소유해도 결국에는 실현시킬 수 없는 그 무엇을 만난 것이다. 버나드의 친구 헬름홀츠도 그렇다. 그는 멋진 신세계에서는 전혀 필요가 없는 ‘비실용적인’ 글을 쓰고 싶은 자신을 발견한다. 예술이나 문학 자체가 없어진 세상에도, 셰익스피어도 성경도 사라진 곳에서도, 그것에 대한 ‘열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1984』의 윈스턴도 그렇다. 그는 무언가 ‘글을 쓰고 싶은’ 자기 자신과 만난다. 모든 것이 충족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글로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윈스턴은 고물상의 진열창에서 어여쁜 옛날 공책을 하나 발견하고 어쩔 수 없는 소유욕에 사로잡힌다. 그는 다만 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일기 쓰기조차 이단적 행위다. 『1984』에서는 ‘일기쓰기’가,『멋진 신세계』에서는 ‘셰익스피어’가 금지된다. 어떤 외적인 강제도 아닌 완전한 자발적 의지로 글을 쓴다는 것. 글쓰기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창조의 주체, 저항의 주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달리 예쁜 공책이었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다소 노랗게 탈색되기는 했지만 공책의 부드러운 크림색 종이는 지난 40년 동안 생산되지 않은 고급 종이였다. (…) 윈스턴은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아담한 고물상의 진열창에서 공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말겠다는 어찌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당원의 신분으로 그런 가게에 들락거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 규정이 엄격히 준수되는 편은 아니었다. (…) 그는 구입한 공책을 서류 가방 깊숙이 넣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왔다. 공책에는 물론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윈스턴은 지금 일기를 쓰기 시작하려는 것이다. (…) 당국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거나 최소한 25년간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썩어야만 했다.
-조지 오웰, 이기한 옮김, 『1984』,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