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vs 『오페라의 유령』 마지막회
분노와 질투가 삼켜버린 사랑
난 한 가지만 기도하겠어. 내 혀가 굳어질 때까지 되풀이하겠어.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나를
찾아오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면서?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9, 274쪽.
질투심으로 인해 인간은 ‘내가 가진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이 가진 것’에서 괴로움을 느낀다. 원한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인간을 소멸시킨다. 히스클리프의 질투, 히스클리프의 원한이야말로 그를 소진시키는 어둠의 에너지였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부재라는 압도적인 어둠에 질식하여,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소중한 것들이 뿜어내는 가녀린 빛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의 인생에도 빛이 있고 꽃이 있고 보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어둠만을, 그림자만을, 무덤만을 파헤쳤다. 그는 그렇게 평생 자신의 어둠만을 응시하다 자신의 곁을 드리우고 있는 환한 빛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폭풍의 언덕』의 첫 장면은 이미 캐서린이 죽은 시점에서 시작된다. 여성의 자유로운 삶이 보장되지 않았던 그 시절, 캐서린의 목소리는 오직 죽은 뒤 그녀의 ‘낙서’의 형태로 보존될 수 있다. 이 소설의 화자 중 하나인 록우드는 우연히 눈보라에 갇혀 히스클리프의 ‘워더링 하이츠’를 방문하고, 죽은 캐서린의 방에서 그녀의 ‘유령’ 이미지와 조우한다. 유령이 되어 히스클리프의 창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단말마적 비명은 바로 ‘렛 미 인(Let me in!)’이었다. 나를 당신들의 세상 속으로 들여보내달라고. 숨 쉬고 먹고 웃고 떠들고 울고 달리고 춤추는, 당신들의 살아 있는 세상 속으로, 나를 들여보내달라고. 캐서린의 소름끼치는 망령은 공포와 함께 연민을 자아낸다. 두 사람의 못다 이룬 사랑은 캐서린을 ‘살아 있는 죽음’으로 히스클리프를 ‘죽어버린 삶’으로 박제시켜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캐서린은 죽어서도 죽지 못했으며, 히스클리프는 살아서도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보다 더 나 자신(he's more myself than I)’이라고 속삭였던 캐서린은 죽어서도 히스클리프의 ‘또 다른 자아’로 살아남아,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 것이다. 캐서린의 무덤을 ‘중심’으로 히스클리프와 에드거의 무덤이 위치한다. 살아서도 두 남자를 자신의 양손에 쥔 채 누구도 놓지 않으려했던 캐서린은 무덤 속에서도 히스클리프와 에드거를 나란히 거느릴 수 있게 된다.
죽음은 고통의 승화나 용서의 실마리가 되곤 한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생생하게 고통의 환부를 드러내기도 한다. 캐서린의 죽음과 에릭의 죽음 또한 그렇다. 캐서린의 죽음은 더 이상 은폐할 수 없는 등장인물의 갈등과 애증을 마침내 폭발시켰고, 에릭의 죽음은 언뜻 ‘미스테리의 종말’로 보이지만 그가 겪었던 평생의 고통은 그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세상에는 그렇게 죽어도 죽지 않는 주인공들이 있다. 죽어서야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죽음은 갈등의 종결이 아니라 풀리지 않는 생의 신비의 진정한 시작이다.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을 기다리듯이,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유령을 기다리고, 크리스틴은 에릭의 망령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문학은 이렇듯 ‘끔찍한 유령’마저 명실상부하게 ‘아름다운 주인공’으로 만드는 시간의 마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소설들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죽어서도 포기할 수 없는 못 다한 이야기들의 힘을, 죽음으로도 봉합할 수 없는 세계의 진실을 발굴하는 문학의 힘을.
나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어. 그녀는 분명히 살아 있는 여자였어……. 내가 키스한 이후에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곁에 머물렀어. 누군가에게 키스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하던지! 아마 자네는 내 기분을 모를 거야. 내 어머니조차 내가 키스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 엄마는 뒤로 물러서면서 내게 가면을 던져주었지……. 난, 그 뒤로 어떤 여자와도 키스해본 적이 없었어.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런 행복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나는 눈물을 흘렸어. 그녀의 발치에 몸을 숙이고 울었지.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자그마한 발에 입을 맞추었지……. (……) 그런데 그녀의 눈물이 내 이마에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물이었어. 그녀의 눈물이 내 가면 뒤에 있는 얼굴 전체를 적셨고, 내 눈물과 섞여 뒤범벅이 되었지. 그리고 내 입술까지 흘러내려 적셔주었네. 그녀의 눈물이 내 얼굴 전체를 적셨을 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말해 주지. 난 그녀의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흘리고 싶지 않아 가면을 벗어던졌다네. 그런데 그녀는 날 전혀 피하지 않았어. (……) 우리 두 사람은 그러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지……. 오, 하느님, 이제 내게 최고의 행복을 선사해주시는군요!
―가스통 르루,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3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