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vs 『오페라의 유령』⑧
마지막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히스클리프 씨가 아씨를 껴안으려고 무릎을 꿇고 있던 한쪽 다리로 일어서려고 하자, 아씨는
그의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했어요. (……) “당신이 얼마나 괴롭든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당신의 괴로움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야. (……) 당신은 나를 잊겠지? 당신은 내가 땅에 묻히면
행복하겠어? 이십 년 뒤에 당신은 이렇게 말할 거야? ‘저것이 캐서린 언쇼의 무덤이야. 오래전에
나는 그녀를 잃고 슬퍼했지. 그러나 지난 일이야. 그 뒤로 나는 그밖에 여러 사람을 사랑했고
내 아이들이 그녀보다도 더 소중하지. 죽을 때도 그녀에게 가는 게 좋기보다는 아이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슬플 거야!’ 그렇게 말하겠지, 히스클리프?” (……) 그 당시 아씨의 표정은
창백한 뺨과 핏기 잃은 입술과 반짝이는 눈에 맹렬한 복수심을 나타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거머쥔 손가락 사이에는 잡고 있던 히스클리프 씨의 머리칼이 한 줌 빠져 남아 있었어요.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9, 258~259쪽.
지금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행복했었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과 같은 행복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오직 과거에만 있었다는 것. 이런 생각에 빠진 사람은 어떤 행복도 맞이할 수 없고, 어떤 기회도 잡을 수 없다. 히스클리프도 그랬다. 캐서린과 함께 행복했던 짧은 유년 시절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 그는 인생 전체를 통째로 저당 잡힌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그들이 누렸던 과거의 행복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과거를 되찾을 수 없기에 늘 불행하다고 느끼는 히스클리프. 그에게 불행은 습관이자 천성이 되어버렸다. 질투와 분노, 저주조차 일상이 되어버렸다. 히스클리프의 증오와 복수로 인해 캐서린은 병들어버렸고,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캐서린은 체면과 자존심을 던져버리고 자신의 진심을 토로해버린다. 저승에 가서도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당신을 저승까지도 데려갈 거라고.
캐서린의 죽음이 가까워오자, 두 사람은 이제 아무것도 숨길 수 없게 되어버린다. 캐서린은 자신의 우아한 일상 뒤에 숨은 뼈아픈 상실을, 히스클리프는 독기 어린 분노 뒤에 감춘 변함없는 그리움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그녀가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야, 그들은 서로의 숨길 수 없는 사랑을 확인한다. 그 모든 복수와 증오, 질투와 분노가 모두 지나친 사랑, 지나친 열정, 지나친 순수 때문이었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커져버린 분노를 감출 수 없는 캐서린은 절규한다. 너도 나만큼 고통 받게 하겠다고, 죽어서도 널 괴롭힐 거라고. 히스클리프도 지지 않고 함께 절규한다. “나는 나를 죽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바로 당신을! 내가 어쩔 수 있겠어?”
평생 가면으로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했던 에릭. 그의 가면도 이제 사랑의 이름으로 벗겨지는 순간이 왔다. 에릭에게 납치된 크리스틴은 탈출을 위해 에릭의 가면을 이용한다. 그녀를 납치하고 그녀를 감금해서라도 그녀의 사랑을 얻고 싶은 에릭의 진심에 호소한 것이다. 이제 그만 당신의 가면을 벗어도 좋다고. 아니, 반드시 벗어야만 한다고. 가면 뒤의 당신 얼굴이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나는 그 얼굴을 두려움 없이 사랑할 것이라고. 사랑에 눈 먼 에릭은 크리스틴의 달콤한 거짓말을 믿는다. 차라리 그의 가면을 벗기지 않았더라면, 가면 뒤의 끔찍한 얼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않았더라면, 에릭은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붉은 잉크로 쓰인 악보 책을 다시 들여다보자, 악보가 실제로 붉은 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죠! 그 음악은 처절하고 눈물겨운 순교의 심연 속으로 나를 이끌었어요. 추하게 생긴 한 남자의 심연이. 흉측한 머리를 지옥의 암벽에 부딪히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땅 밑으로 도망치는 에릭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어요. (……)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쳤어요. ‘에릭, 두려워하지 말고 얼굴을 보여주세요. 당신은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으나 가장 숭고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이 순간 이후 내가 당신을 보고 전율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천사 같은 음성과 빛나는 재능 때문일 겁니다.’
그러자 에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어요. 그는 내 말을 믿었고 나도, 맙소사, 내가 한 말을 온전히 믿었어요. (……) 내가 계속 거짓말했던 보름 동안, 그는 다시 생기를 되찾았어요. 내가 한 거짓말들은 나를 그럴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그 괴물만큼이나 끔찍했지요. 그러나 그 거짓말 덕분에 나는 이렇게 자유를 찾았어요. 나는 아예 그의 가면을 태워버렸죠. 내 마음을 감쪽같이 숨기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행동했어요.
―가스통 르루, 홍성영 옮김,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16~2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