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vs 『오페라의 유령』⑦
맹점(blind point):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
히스클리프는 ‘우리’라는 말에 몹시 화가 났던 모양이야. 그는 절대로 우리 방이 아니며, 내 방이
될 수도 없다는 거야. (……) 그는 교묘하고도 끈질기게 나의 미움을 사려는 거였어! 나는 때때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무서운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어. 이제는 호랑이도 독사도 내게는
그처럼 무섭지 않아. 그는 내게 캐서린 언니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오빠가 병을 더치게
했다고 비난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에드거 오빠를 손에 넣을 때까지 나를 대신 괴롭히겠다는 거야.
그가 지긋지긋해. 나는 비참해졌어. 바보짓을 했어.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237쪽.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들의 사랑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들의 사랑 말고도 지켜야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사랑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장벽들이 얼마나 많은지. 중국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을 정도다. 사랑은 온 몸이 눈이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귀찮아질 때가 많다. 때로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껴 있어도, 마치 이 세상에 두 사람뿐인 것처럼 행동하는 연인들. 사랑을 생각할 때 ‘현실’을 생각하면 사랑이 구차해지고, 뭔가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실 없이는, 타인들 없이는, 세계도 사랑도 인생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맹목적인 사랑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 자체가 이미 충분히 저주받았다고 믿기에, 충분히 고통뿐인 삶이었다고 믿기에, 캐서린이라는 유일한 구원의 출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역시 사랑에 빠져 주변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사벨라 또한 히스클리프에게 자발적으로 납치당하다시피 하여 이제는 히스클리프의 것이 되어버린 ‘워더링 하이츠’에 입성한다. 이사벨라는 가는 곳마다 오직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추억으로 가득한 워더링 하이츠에서 자신은 이방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히스클리프는 이사벨라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녀를 냉대하고 혐오하고 방치한다. 이사벨라는 오빠인 에드거에게 SOS를 신청하지만, 이미 캐서린과 이사벨라, 히스클리프 모두에게 상처받은 에드거는 여동생의 구조 신호조차 철저히 무시해버린다. 각자 자신의 사랑만을 쳐다보고 있는 네 사람은 이렇게 서로의 삶을 부지불식간에 파괴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오페라의 유령 에릭은 워더링 하이츠의 새주인 히스클리프보다 한층 더 잔혹한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지킨다. 오페라 극장의 지하 세계 전체의 숨은 주인, 에릭. 에릭은 거대한 오페라 극장 곳곳의 특징을 속속들이 꿰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없는 대신 오페라 극장의 숨은 조종자가 되고자 한다. 천재적인 작곡 실력과 천상의 목소리,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에릭은 오페라 극장에 모여드는 모든 이들의 ‘감동의 매뉴얼’을 통제하고자 한다. 자신이 만든 음악으로, 자신이 교육시킨 크리스틴의 목소리로, 자신이 몰래 통제하는 오페라극장에서, 수많은 관객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틴도, 그녀를 사랑하는 라울도, 오페라극장을 에릭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사람들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틴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오페라 극장 전체를 날려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는 에릭의 광기를, 라울은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크리스틴이 실종되자 에릭의 은신처로 숨어든 라울은 에릭이 거대한 화약통을 숨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야 만다. 에릭은 크리스틴을 협박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의 청혼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온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 낫다고. 온 세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 또한, 나의 사랑 또한 사라질 거라고.
난 뭐든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하지만 이제 그런 것도 모두 지겨워. 정말이지 지겹다고! 내 집에 숲을 만들어 놓은 것도 지겹고, 고문실도 지겨워. 사기꾼처럼 이중벽에 갇혀 사는 것도 정말이지 지겨워……. 보통 사람들처럼 문과 창문이 달린 조용하고 평범한 집에서 정숙한 아내와 함께 살고 싶다고! 크리스틴,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할 거야. (……) 보통 사람들처럼 일요일이면 단 하나뿐인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산책하고, 일주일 내내 그녀를 웃게 해주고 싶어. 당신은 나와 함께라면 싫증나지 않을 거야. 내 가방 안에는 카드 이외에도 보여줄 게 무궁무진하지! 카드 묘기 보고 싶지 않아? (……) 사랑하는 크리스틴, 내 말 듣고 있소? 당신은 이제 나를 밀어내지 않는군. 나를 사랑하나? 아니, 그렇지 않지만 그건 아무 상관없어. 앞으로는 사랑하게 될 테니까.
―가스통 르루, 홍성영 옮김,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3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