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vs 『오페라의 유령』 ⑥
바람직한 환상 vs 피하고 싶은 실제
아주 이상하게도 지난 칠 년 동안의 생활 전체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생각되었어. 도대체 그 칠년이
있었다는 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어! 나는 어린아이였고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힌들리 오빠가 히스클리프와 같이 놀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슬퍼하고 있었어. (……)
열두 살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워더링 하이츠와 어렸을 때 친숙했던 모든 것과 그 당시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던 히스클리프한테서 억지로 떨어져 나와서 단박에 린튼 부인이며,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안주인이며, 낯선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거지. 그때부터 쭉 자기
세계에서 쫓겨나고 버림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걸 생각해봐. (……) 오, 내 몸이 불덩이 같아!
밖으로 나갔으면, 다시 야만에 가까운, 억세고 자유로운 계집아이가 되어 어떠한 상처를
입더라도 미치거나 하지 않고 깔깔 웃을 수 있었으면!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6쪽.
끔찍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첫째,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환상의 돌파구를 찾는 것. 둘째, 현실 그 자체의 출구 없음을 인정하고 현실과 싸우기로 결심하는 것. 또는 현실 그 자체의 출구 없음을 인정하되, 현실에 맞장 뜨기를 포기하고 지금 넘어진 그 자리에 안주하고 침묵하고 견뎌내는 것. 캐서린의 선택은 첫 번째 길이었다. 그녀가 찾은 환상의 돌파구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연인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먼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위치로 격상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저 높은 곳에 서 있는 린튼과 결혼하면, 자신이 그곳에서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 저 낮은 곳의 히스클리프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환상의 달콤한 유혹에 빠질 때 곧잘 간과하는 것이 있다. 내가 환상에 빠져 있는 동안, 내 환상의 ‘대상’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히스클리프를 구원하는 상상에 빠져 있었던 캐서린의 기대와 달리, 히스클리프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얌전히 빠져 있지 않았다. 히스클리프는 스스로 구렁텅이에서 뛰쳐나와 탈주했다. 캐서린이 구해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히스클리프가 아니었다. 그는 캐서린의 ‘격’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두 사람 모두 놓친 것이 있었다. 그 모든 방황이 그들의 사랑을 위한 것이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큼 완벽한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캐서린은 린튼과 결혼하여 겉으로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던 시간 동안, 자신의 기억이 통째로 삭제된 듯한 또 다른 환상 속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두 남자 모두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한다. 린튼은 반쪽짜리 사랑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히스클리프는 반쪽이 되느니 차라리 스스로 갈가리 찢어버리는 길을 택한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린튼을 향한 최고의 복수가 바로 린튼의 여동생 이사벨라와의 결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캐서린이 ‘탈출구’로 생각하던 안락한 환상이 오히려 그녀가 살아가야할 진짜 현실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 또한 그녀가 꿈꾸는 ‘바람직한 환상’에 들어맞지 않는 ‘참혹한 현실’을 향해 눈을 질끈 감고 싶다. 그녀는 석 달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최고의 상태로 이끌어준 음악의 스승, 에릭이 ‘음악의 정령’이라 믿고 싶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매번 가면을 쓰고 접근하는 그의 신비로운 행적이 이 환상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녀는 첫사랑 라울에게 고백한다. 에릭은 오페라의 유령도, 음악의 정령도 아닌, 한 남자에 불과했다고. 그녀에게는 ‘음악의 정령으로서의 에릭’이라는 유치한 환상이, ‘끔찍한 외모 때문에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살아야 하는 한 남자’라는 현실보다 견디기 쉬웠던 것이다.
나는 특별한 이유 때문에 오페라 극장 지하에 살게 된 특이한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게 분명했어요. 그는 극장 측의 묵인 아래, 온갖 이야기가 떠도는 현대판 바벨탑의 한구석에 피난처를 마련한 것이었지요.
가면으로는 턱없이 감출 수 없는 목소리, 그 유령은 바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저 한 남자에 불과했던 것이죠! (……)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천사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 남자에 불과했다니! 속으로 절규하던 난 울음을 터뜨렸어요.
“맞아요, 크리스틴! 난 천사도, 정령도, 유령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에릭이라고 하오.”
―가스통 르루, 홍성영 옮김,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