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vs 『오페라의 유령』 ⑤
뜻밖에, 아름다운 영혼
당신이 재미나거든, 나를 죽도록 곯려도 좋아. 대신 나도 마찬가지로 재미 볼 수 있게 해줘.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나를 모욕하진 말아줘. 내 궁전을 헐고 대신 오막살이를
세워주고는 내게 집을 지어줬다고 우쭐해서 생색내지 말란 말이야. 당신이 정말로
내가 이사벨라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면 내 목을 베어버리겠어!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186쪽.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진심을 투명하게 표현하는 일이 세상 무엇보다도 어렵다.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 또한 그렇다. 캐서린의 ‘격’에 맞는 남자가 되기 위해 몇 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했지만, 돌아와 보니 캐서린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히스클리프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절망을 어떻게 치유하는지, 행복을 어떻게 얻는지를 몸으로 배우지 못했다. 에드거 린튼과 결혼한 캐서린의 행복을 파괴하는 것이 자신의 사랑을 되찾는 길이라 믿는 히스클리프.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캐서린은 물론 히스클리프도 놀란다. 하지만 히스클리프는 이사벨라의 이 순수한 사랑을 자신의 ‘복수’에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캐서린은 자신의 행복 자체가 히스클리프에게 고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히스클리프는 이사벨라를 이용해 캐서린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려 한다. 히스클리프의 계획을 알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캐서린.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차라리 이사벨라와 결혼하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은 후 고통스러워한다. 히스클리프가 떠나고 난 후, 뭔가에 홀린 듯 에드거와 결혼한 후 평화롭게 살아온 지난 몇 년간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진다. 처음으로 사랑에 눈뜬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의 사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명문가의 자제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야생적 매력에 이끌린다. 어머니를 일찍 잃은 캐서린에게 엄마 같은 존재인 하녀 넬리는 이사벨라에게 경고한다. 히스클리프는 불길한 징조를 가지고 오는 새 같은 사람이라고. 그러나 이사벨라는 한사코 히스클리프가 보여주지도 않는 아름다움을 보려 한다. 히스클리프는 악마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훌륭하고 진실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캐서린조차 히스클리프는 ‘지옥’에 갈 차표를 미리 끊어놓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이사벨라만은 히스클리프의 사악한 표정 뒤에 감춰진 가녀린 선의를 읽어내려 한다.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과 라울 또한 사람들이 모두 ‘오페라의 유령’이라 부르는 에릭의 흉측한 외모 뒤에 감춰진 아름다운 영혼을 알아본다. 에릭의 아름다운 영혼은 그의 노래를 통해 드러난다. 에릭의 흉측한 외모 뒤에 이토록 아름다운 영혼이, 이토록 아름다운 목소리가 숨겨져 있었다니. 라울은 비로소 자신이 질투하던 남자, 에릭의 ‘실체’와 만난다. 음악은 욕망의 가면을, 갈등의 외피를 깨뜨리고 오직 영혼의 빛과 무늬를 그대로 드러내는 마력을 지닌다. 라울은 크리스틴에게 찾아온 ‘음악의 정령’이 에릭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유령처럼 끔찍한 에릭의 모습을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매치’시키지 않았을 때, 그 목소리의 진가를 알아본다. 얼굴 없는 목소리의 노래는 라울을 감동시킨다. 단 한 번의 울림에도 모든 미덕을 느낄 수 있는 목소리. 한 번 들으면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최고의 목소리. 손만 갖다 대도 영혼을 변화시키는 신의 옷깃 같은 목소리. 그 목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뚫릴 것만 같은 목소리. 자신의 의지와 에너지, 판단력까지도 모조리 빼앗을 듯한 목소리. 라울은 자신의 정신을 온통 마비시키는 이 음악의 힘에 크리스틴 또한 점령당했음을 알게 된다.
얼굴 없는 목소리는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는데, 라울이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놀라운 목소리였다. 강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웠고, 웅장하면서도 당당하고 승리감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섬세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단 한 번의 울림에도 모든 미덕을 느낄 수 있는 목소리였다. 한 번 들으면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최고의 목소리였다. 대가로서 갖추어야 할 단호함이 있었고, 음악을 사랑하고 표현하는 사람이라면 단 한 번만 들어도 음악적 소양을 발전시킬 수 있을 듯한 힘이 깃든 음성이었다. 고요하고 순수한 조화가 담긴 그 목소리는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한껏 들이마시고 싶은 깊고 잔잔한 음악의 샘과 같았다. 손만 갖다 대도 영혼을 변화시키는 신의 옷깃처럼, 그 노랫소리를 들은 가수라면 누구나 흠모할 법한 목소리였다.
―가스통 르루, 홍성영 옮김,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58~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