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vs 『오페라의 유령』 ④
유령과의 조우
“넬리, 당신이야?”
그것은 깊이 있는 음성이었고, 외국인 같은 어조였어요. 그런데 제 이름을 발음하는 투가
어딘지 귀에 익은 데가 있었어요. 그는 누군가 하고 두려워하면서 돌아보았어요.
문들은 닫혔고 계단 쪽으로 오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현관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게 보였어요. 가까이 가보니 얼굴과
머리가 검고 검은 옷차림을 한, 키가 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
달빛 한 가닥이 그의 모습을 비췄어요. 두 뺨은 거무스레했고 검은 구레나룻이 반쯤
덮혀 있었어요. 눈썹은 험상궂고, 두 눈은 깊이 박혀 특이한 데가 있었지요.
그 두 눈이 기억에 되살아났어요. (……) 저는 그를 이 세상 사람이라고 봐야 하는
것인지 몰라 소리치고 놀라움에 두 손을 쳐들었습니다.
“뭐, 네가 돌아온 거야? 정말 너야, 정말?”
“그래, 히스클리프야.”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153~154쪽.
두 사람은 모두 유령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유령처럼 대한다.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도, 『오페라의 유령』의 에릭도, 사람들에게는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소름끼치고, 두려운 존재들이다. 보통 사람들과 섞일 수 없는 사람들, 평범한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들, 어쩐지 ‘우리’의 안전과 평화에 위해를 끼칠 것만 같은 사람들. 그들은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준다. 그들은 나타나는 듯 사라지고, 사라지는 듯 나타난다.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늘 예측불허다. 그들은 어떤 계급도 직업도 가족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안정한 위치, 애매모호한 일상이야말로 ‘우리의 정상적인 삶’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 대한 두려움은 곧 ‘나의 평화로운 삶을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죄책감 때문이기도 하다.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은 ‘우리, 정상적인 세계’와 ‘그들, 이질적인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정상적인 삶의 안전과 평화를 즐길 줄 알지만, 이질적인 세계로 풍덩 빠지는 짜릿한 모험의 쾌감 또한 잘 알고 있다. 그 모험의 가이드는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들이다. 크리스틴은 에릭이 초대하는 ‘오페라의 유령’으로서의 삶에, 캐서린은 히스클리프가 안내하는 ‘야생의 집시’ 같은 위험한 삶에 이끌린다. 크리스틴은 에릭으로부터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기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법을 배운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함께한 시간들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것, 즉 ‘자유의 공기’와 ‘야생의 기쁨’을 배운다.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이 모든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갈 곳이 있다. 돈과 명예와 인품을 모두 갖춘 『폭풍의 언덕』의 린튼과 『오페라의 유령』의 라울. 두 사람은 저 유령 같은 존재, 알 수 없는 존재들로부터 각자 자신의 하나뿐인 그녀들을 지키느라 혈안이 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침입자, 파괴자, 유령처럼 보이는 그들도 한 사람의 남자라는 것. 그들은 유령처럼 보이는 히스클리프와 에릭이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눈부시도록 따뜻한 미소를 모른다. 자신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접하는 하녀 넬리에게 히스클리프는 함부로 하지 못한다. 오페라의 유령은 자신에게 박스석을 마련해주는 여직원 쥘르 부인에게는 넉넉하게 팁까지 챙겨준다. 유령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을 ‘유령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대하듯이 친절하고 살갑게.
“유령이 작은 의자를 부탁했다면, 유령이 여자란 말이오?”
몽샤르멩이 물었다.
“아니에요, 유령은 남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야 남자 목소리였으니까요. 아, 너무도 부드럽고 그윽한 음성이었죠. (……) ‘쥘르 부인, 작은 의자 하나만 부탁합니다.’ 죽은 제 남편의 이름이 쥘르거든요.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목소리가 계속 들려 왔지요. ‘쥘르 부인, 두려워 마시오. 나는 오페라의 유령이오.’ 목소리가 들리는 구석을 얼핏 쳐다보았는데, 워낙 목소리가 근사하고 우호적이라 두려운 마음은 거의 없었습니다. (……) 보이지 않을 뿐, 누군가 점잖은 사람이 그곳에 앉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 유령 부인의 옷에서 떨어진 장미 한 송이가 박스석에 떨어져 있기도 했어요. 때로 여성을 동반한 게 분명해요. 참! 부채를 두고 간 적도 꼭 한 번 있었지요.”
“유령이 부채를 두고 갔다고? 그래서 어떻게 했소?”
“나중에 돌려주었지요.”
―가스통 르루, 홍성영 옮김,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72~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