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vs 『오페라의 유령』 ③
연인, 지옥의 동반자
저 방에 있는 저 고약한 사람(힌들리, 캐서린의 오빠)이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던들 내가 에드거와 결혼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나 지금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히스클리프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히스클리프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거고(……) 나를 지독히 이기적인 계집애라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우리가 거지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내가 린튼과 결혼한다면
히스클리프가 오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울 수가 있어.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133~135쪽.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사이에는 ‘신분’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자리 잡고 있다. 캐서린은 어린 시절에는 히스클리프와 남매처럼 지내면서 요조숙녀와는 거리가 먼 말괄량이 다혈질 소녀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점점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일 자체가 그녀에겐 끔찍한 ‘터부’가 될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이제 대놓고 히스클리프를 몸종처럼 부리는 오빠 힌들리를 보면서 캐서린은 분노를 느끼지만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여성의 사회적 영향력이 극히 미미했던 시절. 캐서린의 선택은 거의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와 점점 멀어지는 동안, 부와 명예를 동시에 갖춘 화려한 가문 출신 도련님 에드거 린튼이 캐서린에게 접근한다.
순진했던 캐서린은 영리하게 자신의 미래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히스클리프와 내가 결혼한다면 우린 분명 거지꼴이 되겠지?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할 거야. 하지만 에드거 린튼과 결혼한다면? 나는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고, 그러면 저 비참한 히스클리프도 구해줄 수 있지 않을까. 캐서린은 이런 속셈을 하녀 넬리에게 고백하고, 히스클리프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야 만다. 이 모든 계략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캐서린의 ‘사랑’ 때문이었지만,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고백은 듣지 못한 채, 오직 ‘히스클리프는 나와 격에 맞지 않아’라고 실토하는 장면만을 기억한 채 가출해버린다.
히스클리프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잃은 충격으로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모두가 ‘집시 같은 하인 따위’에 마음을 두는 캐서린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모두가 히스클리프를 잊어갈 무렵, 히스클리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여 다시 나타난다. 캐서린은 이미 ‘린튼 부인’이 되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뭐라고? 그 집시라고! 그 들에서 일하던 녀석?” 히스클리프가 돌아오자마자 캐서린의 남편 린튼은 경악한다. 히스클리프가 떠난 후 패닉 상태에 빠져 지독한 열병을 앓았던 캐서린은 이제야 린튼과의 결혼생활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끔찍한 파란을 예고한다. 그들의 삶에서 ‘사라진 짐짝’이었던 히스클리프는 이제 다시 돌아와 ‘살아 있는 악몽’이 된다. 캐서린에게 히스클리프는 천국이자 동시에 지옥이었던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에게도 에릭은 천국이자 동시에 지옥이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줄 수 없는 에릭은 크리스틴에게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목소리를 선물한다. 별 재능 없는 무명 신인에 불과했던 크리스틴은 에릭의 비밀스런 멘토링으로 최고의 가수로 등극한다. 끔찍한 해골 위에 검은 망토를 걸친 유령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에릭. 그를 사람들은 모두 ‘유령’이라 믿는다. 그 믿음처럼, 그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인물이다. 에릭은 자신이 갇힌 마음의 지옥 속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크리스틴이라 생각한다. 천국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지옥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지옥 속으로 함께 들어갈 유일한 동반자를 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매혹적인 목소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천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면 지옥에서 올라온 목소리일 것이다. 크리스틴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닐까? 크리스틴 다에가 부르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삼중창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파우스트를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환하게 빛나는 목소리,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만드는 순수와 신성함은 그 끝을 헤아릴 길이 없다!
―가스통 르루, 홍성영 옮김,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