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vs 『오페라의 유령』 ②
인간과 유령, 주인과 노예 사이에서
아침 일찍 시작해서 저녁 늦게 끝나는 끊임없는 고된 일이 한때 그(히스클리프)가 가졌던 지식욕과
책이나 학문에 대한 애정을 다 없애버렸지요. 언쇼 어르신의 귀염으로 갖게 되었던 어릴 적의
우월감도 사라져버렸답니다. 오랫동안 공부 면에서 캐서린 아가씨에게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져버리고,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사무치는 후회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 그러자 용모까지 정신적인 타락과 보조를 같이 하여 걸음걸이도 단정치 못해지고, 얼굴도
비열해졌지요. 타고난 무뚝뚝한 성품이 과장되어서 거의 바보처럼 지나치게 붙임성 없는
침울한 성격으로 변해버렸어요. 그리고 많지도 않은 아는 사람들에게 존경보다는 차라리
미움을 품게 하는 데 이상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112~13쪽.
그에게는 ‘나는 누구다’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 주인댁 도련님도 주인댁 하인도 아닌 기이한 위치에서 평생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했던 히스클리프. 그는 자신이 어디에 속한다는 소속감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캐서린의 아버지는 거리를 떠돌던 고아 소년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려와서 사랑을 듬뿍 주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다. 캐서린의 아버지로부터 받아본 사랑은 히스클리프에게 평생 되찾을 수 없는 행복이 되어버린다. 누구의 사랑도 지속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는 히스클리프, 그리하여 온 세상을 언제든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히스클리프. 그가 유일하게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그녀가 캐서린이었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고 누구도 존경해본 적이 없으며 누구도 아끼고 돌봐준 적이 없는 야생의 인간, 히스클리프. 입양인지 하인인지 불분명한 상태로 캐서린의 아버지는 죽었고,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가 돌아오자 히스클리프는 자신이 하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하인의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는 다시 예전의 고아 소년보다 더 지독한 고독 속에 빠진다. 만지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눈앞에 널려 있지만 그 중 아무것도 제대로 소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바로 캐서린에 대한 사랑이었다.
『오페라의 유령』의 주인공 에릭도 마찬가지로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그런 보통의 삶, 보통의 행복을 에릭은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다. 그런 에릭에게 크리스틴은 유일한 애착의 대상, 유일한 꿈이다. 크리스틴은 에릭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 아름다운 비밀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도 안다. 크리스틴은 에릭의 뮤즈이자 에릭의 아바타였던 것이다. 라울은 에릭과 크리스틴의 비밀을 아직 모른다. 크리스틴에게 반해버린 라울은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정령으로부터 받은 수업’ 때문이라는 노부인의 증언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정령으로부터 수업을 받는다는 이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라울은 크리스틴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정령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 분명 크리스틴은 매력적인 남자 가수에게 따로 비밀스런 ‘수업’을 받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히스클리프를 집시 혹은 야만인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에릭을 유령 혹은 괴물이라 부른다. 캐서린과 크리스틴. 그녀들은 모두가 꺼려하는 이 괴물 같은 존재의 외양 속에 감춰진 선의를, 사랑을, 진심을 알아본다. 그녀들은 겉으로는 전혀 닮은 면이 없어 보이는 이 기괴한 인물들에게 ‘바로 나 자신’을 투사한다. 나 아닌 전혀 다른 존재에게서 나를 발견해내는 은유의 능력.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능력이다.
매일 저녁 하늘에서 내려온 정령이 오페라 극장의 대기실 등 예술가들을 찾아온다는 그 순수한 믿음에 라울은 당황스러웠다.
그는 미신에 사로잡힌 떠돌이 악와 계시를 받은 노부인에 의해 길러진 크리스틴의 정신 상태가 이제서야 짐작이 갔다. 그로 인해 빚어질 모든 결과를 생각하니 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그녀가 그 정령을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석 달 정도 되었죠. 맞아요, 그가 크리스틴에게 수업을 시작한 지 그 정도 되었겠네요.”
(…) “정령이 교습을 해주었다니! 네, 그랬다면 도대체 어디에서요?”
(…) “오페라 극장은 여덟 시 쯤에는 아무도 없어서,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지요.”
(…) 라울은 벽에 머리라도 부딪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순수함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기에 순수한 마음과 때 묻지 않은 생각으로 모든 걸 알아내고 이해하려 애썼지만, 음악의 정령이라니! 지금에서야 그 정령의 정체를 제대로 알게 되다니! 그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 했다. 그는 분명 곱상한 외모의 테너가수로서, 노래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놈이 분명했다.
―가스통 르루, 홍성영 옮김,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39~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