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vs 『오페라의 유령』 ①
그대, 나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히스클리프씨에게는 그의 거처나 생활양식과는 이상하게 어울리지 않는 데가 있었다. 얼굴은 집시처럼 검지만 차림새와 태도는 신사이다. 신사래야 시골 유지 정도의 신사로, 단정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나 잘생기고 곧은 체구라서 아무렇게나 하고 있어도 어색하지는 않고, 약간 침울한 편이었다.
(…) 그가 무뚝뚝한 것은 감정을 야단스럽게 드러내 보이는 것, 이를테면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내보인다든가 하는 것이 싫어서라는 것을 나는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11쪽.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방의 무엇을 바라보는 것일까. 상대방이 가진 가장 멋진 어떤 것에 홀리는 것일까. 예를 들면 아름다운 외모라든지 엄청난 재능이라든지 굉장한 재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또다시 다음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아마 훨씬 덜 상처받고 훨씬 덜 외로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명약관화하게 사랑의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을 훨씬 덜 사랑하지 않을까. 사랑의 예측불가능성이야말로, 사랑의 불가해성이야말로 사랑이 가진 가장 짜릿한 매력이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 살펴볼 소설의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 또한 매우 설명하기 어렵다. 이 소설들 속의 주인공들은 심지어 ‘유령’과 사랑에 빠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모두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의 눈앞에서만 그 진실을 드러내는 비극적인 존재들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열정적 사랑의 더할 나위 없는 표본이자 극단을 보여준다. 천애고아로 자라난 히스클리프의 야생마 같은 매력과 맹수 같은 공격성은 온실의 화초로 자라난 예민하고 아름다운 소녀 캐서린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그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러니까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절부터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의 완벽한 분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모두에게 천대받던 고아 소년 히스클리프에게 이해심 많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캐서린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 열려 있는 창문처럼 절박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통해 자신이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던 자기 안의 끔찍한 어둠을 발견한다. 내 안의 가장 두려운 어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 안의 그림자와 맞닥뜨리는 것. 캐서린에게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캐서린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에도, 그러니까 ‘유령’이 되어서도 차마 히스클리프와의 추억의 공간,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를 떠나지 못한다. 워더링 하이츠는 유령이 된 캐서린과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닌 히스클리프가 끝나지 않은 사랑을 이어가는 비극의 공간이다.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은 파리의 오페라극장에서 일어나는 미스테리로 가득한 사랑 이야기다. 이 웅장하고 화려한 오페라극장에 검은 연미복을 입은 끔찍한 유령이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프리마돈나 크리스틴은 공교롭게도 바로 이 무시무시한 유령과 사랑에 빠진다. 사람들이 모두 유령이라고 믿고 있었던 에릭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천상의 목소리를 지녔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끔찍한 흉터를 지니고 있다. 크리스틴을 미칠 듯이 사랑하지만 그녀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에릭. 그런 에릭에 맞서 크리스틴을 지켜내려는 멋진 남자 라울의 용기와 매력 또한 만만치 않다. 인생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의 사랑은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길을 잃은 캐서린과 크리스틴. 이 두 사람은 그녀들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들과 사랑에 빠졌다.
사실이었다. 몇 달 전부터, 검은 연미복을 입고 마치 그림자처럼 오페라 극장 이곳저곳에 출몰하는 유령이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 오페라의 유령은 사람들의 눈에 띄면 홀연히 사라져버렸고, 어디로 어떻게 사라지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마치 진짜 유령처럼 소리 없이 움직였다. (…)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때에도 유령은 우스꽝스럽고 기이한 사건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으레 유령 탓으로 돌렸다. 누군가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거나 무용수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못된 장난을 쳤을 때, 심지어 분첩을 잃어버렸을 때도 모두들 오페라의 유령, 그놈의 유령 탓으로 돌렸다.
―가스통 루르, 홍성영 옮김,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