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vs 『위험한 관계』⑨
버리고 싶은 삶 vs 가지고 싶은 삶
토마스는 그를 둘러싸고 빙빙 도는 반나체 여자들 한가운데 있었고 싫증을 느꼈다. 그 여자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정면에서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그는 다가갔다. 마침내 그녀를 찾았고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어 무한한 행복이 그의
가슴 속에서 퍼져나갔다. (…) 그녀 손의 움직임은 느리고 유연했다. 그는 일생 동안 이런 평화로운
몸짓을 간절히 원했다. 일생 동안 그가 그리워했던 것은 바로 이런 여성적 편안함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잠에서 반의식 상태로 미끄러졌다. (…) 그는 이 여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절망에 빠져서 “하느님 맙소사!”라고 중얼거렸다. (…) 그녀를 그토록 잘 아는데 어떻게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을까?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그녀에게 전화를 걸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니 전화할 수 없으리란 생각에 소스라쳤다. 그토록 잘 아는 누군가의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 그에게 그토록 낯익어 보였던 그 젊은 여자는 사실은 완전히 모르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가 항상 바라던 여자는 바로 그녀였다.
―밀란 쿤데라, 이재룡 옮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66~367쪽.
그런 이상적인 여성은 오직 환상 속에만 존재한다. 토마스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환상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녀를 현실 속에서 꼭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은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그가 테레사를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여자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생 자신이 유혹하지 못한 여성, 자신을 버린 여성을 ‘환상의 여인’으로 고정시킨 채, 잡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든 현실 속의 여성과 그 환상의 여인을 비교하는 남자들처럼. 매번 환상과 현실의 거리를 재다 보면 절망과 환멸만이 남을 뿐이다. 토마스는 환상과 현실의 거리를 인정하지 못했고, 그런 그의 여성편력은 테레사에게 이해받지 못했다.
버리고 싶은 삶과 가지고 싶은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것이 인생일까.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가지고 싶은 삶은 평생 다다를 수 없는 환상이고, 버리고 싶은 삶은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단 한 명의 환상의 여인을 찾기 위해 평생 방황했던 토마스도, 토마스의 사랑 없는 세상에서는 하루도 숨 쉴 수 없는 테레사도, 버리고 싶은 삶과 가지고 싶은 삶 사이의 갭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들이 함께 도달한 무언의 합의점은 바로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지 않기 위해 차라리 급속히 늙어가는 것이었다. 토마스의 뒷모습이 어느덧 늙고 섬약해 보이기 시작하자, 테레사는 그제야 안도하기 시작한다. 그가 더 이상 육체의 욕망을 따라 좌충우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욕망의 도가니인 육체 자체가 시들어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프라하의 정치적 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골의 전원생활을 택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바람조차 피울 수 없는 무위(無爲)의 안락함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발몽과 메르테이유 부인, 두 사람이 일으킨 욕망의 무한질주 또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메르테이유 부인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사랑 따위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임을 증명하기 위해 투르벨 부인을 야멸치게 걷어차 버린 발몽. 발몽 자작과 메르테이유 부인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더욱 자극적인 길, 더욱 스릴 넘치는 유혹의 시간을 위해 ‘나 아닌 타인을 제물로 삼는’ 질투의 게임, 사랑의 게임을 한껏 즐긴다. 그러나 결국 그 제물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다.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진정한 사랑은 없고 오직 순수한 쾌락만이 진실할 뿐이라고 믿었던 두 사람 사이의 협약은 깨져버린다. 발몽은 투르벨 부인을 잔혹하게 배신하고 나서야 자신이 그 사랑 때문에 지나간 삶의 무의미를 보상받았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 투르벨 부인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세실과 발몽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게 된 당스니는 발몽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메르테이유 부인이 발몽을 제압하기 위해 꾸민 계략이다. 결투에서 이긴 발몽이 자신 앞에 와서 무릎을 꿇기를 바랐던 메르테이유 부인의 달콤한 환상은 깨지고 만다. 발몽은 당스니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이 어울리는 곳은 오직 칠흑 같은 어둠일 뿐이라고 절규하며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짙어졌던 투르벨 부인은 발몽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마치 그를 따라가기라도 하듯 저 세상으로 떠난다. 오직 당신과의 사랑 속에서만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발몽의 뒤늦은 메시지를 뒤로 한 채. 발몽은 죽기 직전 자신과 메르테이유 부인 사이에서 오갔던 비밀스러운 계략을 담은 모든 편지를 당스니에게 전했고, 당스니는 이 모든 편지를 사교계에 공개함으로써 메르테이유 부인은 완전히 사회적으로 매장되어버린다. 『위험한 관계』는 ‘결투라는 제도’와 ‘편지라는 매체’로 사랑이라는 자연스러운 열정을 억압하던 18세기 프랑스 사교계의 분위기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메르테이유 부인을 신처럼 떠받들던 사교계 사람들이, 이제 그녀의 계략을 모두 알아버리자 그녀를 공개적으로 따돌리는 장면은 사교계의 가장 끔찍한 단면을 보여준다. 뭇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곧 당하는 사람에게는 공개 처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저께 목요일 메르테이유 부인이 시골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기 전용 좌석이 있는 이탈리아 극장에 내렸습니다. 혼자 앉아 있었는데, 놀랍게도 공연 내내 인사를 하러 오는 남자가 없었답니다. 공연이 끝난 후 부인은 평소대로 휴게실에 들어갔고, 이미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답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부인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긴 의자 하나에 빈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이미 앉아 있던 여자들이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일어나버리는 바람에 부인은 혼자가 되었답니다. 모두가 분개하고 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이었죠. 남자들이 박수를 쳤고, 그러면서 웅성거림이 더 커졌고, 마지막에는 시끄러운 욕지거리가 퍼졌다고 합니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 지음, 윤진 옮김, 『위험한 관계』, 문학과지성사, 541쪽.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던 토마스. 삶에서 얻지 못한 구원을 사랑에서 구하려 몸부림쳤던 테레사. 그러나 테레사는 단지 사랑밖에 난 모른다며 세상 밖으로 도망치는 나약한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또 다른 반려, 암에 걸린 개 카레닌의 고통을 바라보며 실의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에 알려진 위대한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위대한 철학자 니체와 똑같은 차원에서 홀로 위대한 사유를 품고 있던 ‘숨은 철학자’였음을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테레사는 소나 돼지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그들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무시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인류야말로 ‘동물의 기생충’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한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자신의 고통만큼이나 암에 걸려 신음하는 절름발이 개 카레닌의 고통이 끔찍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본다.
테레사는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낫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녀는 자신의 반려동물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 상대방에게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 사랑. 그녀는 토마스와의 관계에서는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의 경지에 오를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지 인간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동물을 비롯한 모든 존재와 인간과의 관계까지 침투하여 ‘관계’를 만들고 허물며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를 실험한다. 그리고 이 끝나지 않는 관계의 실험이야말로 끝나지 않는 ‘소설’의 테마일 것이며, 멈출 수 없는 인류의 화두일 것이다.
내 눈앞에는 여전히 나무둥치에 앉아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류의 실패에 대해 생각하는 테레사가 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이미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 질환이 발병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사는 죽을 병에 거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사다. 나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50~4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