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vs 『위험한 관계 ⑧
‘나’를 잃을수록 행복해지는 순간
사비나는 일생 동안 자신의 적(敵)은 키취라고 단언했더란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키취를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키취,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와 지혜로운 아버지가
군림하는 평화롭고 부드럽고 조화로운 가정의 모습이다. 이 이미지는 그녀의 부모가 죽은 후에
가슴속에서 배태되었다. 그녀의 삶이 이 아름다운 꿈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이것이 지닌 매력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의 멜로드라마 속에서 배은망덕한 딸이 버림받은 아버지를
품에 껴안는 모습이나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이 황혼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녀는 두 눈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밀란 쿤데라, 이재용 옮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97쪽
부둥켜안을 수 있는 생생한 현실이 아니지만, 속아주는 척 그저 믿고 싶은 아름다움이 있다. 쿤데라는 그것을 ‘키치(kitsch)’라 불렀다. 키치는 ‘내가 속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때까지만 키치다. ‘이것은 가짜 아름다움이다’라고 인식하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키치가 아니다. 사비나가 가장 경멸하는 것은 바로 그 키치였다. 사람들이 별다른 이의 없이 동의하는 아름다움. 수많은 사람들의 동의 속에 ‘아름답다’고 각인된 환상. 사비나는 자신이 평생 키치와 싸워왔지만, 자신이 절대로 가질 수 없었던 키치, ‘스위트홈’이라는 환상을 포기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한다. 성냥팔이 소녀가 따스하고 화목한 타인의 집을 훔쳐보며 가질 수 없는 행복의 환상 앞에서 눈물 흘리듯. 쿤데라는 말한다. 우리가 초인이 아닌 인간인 한, 누구도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키치적 아름다움, 키치적 행복, 키치적 소비. 이 모든 것에 대한 경멸은 ‘진정한 아름다움’은 따로 있고, 가짜 아름다움은 결코 그것을 따라갈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사비나는 키치를 열정적으로 증오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키치에 대한 동경을 버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무리 키치를 멀리 하려 해도 키치 자체가 인간 조건의 일부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98쪽)
사비나의 키치처럼, 발몽이 증오하는 것은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환상이었다. 내 삶이 완전히 타인에게 종속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 발몽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나의 기쁨, 나의 슬픔, 나의 꿈마저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타인의 욕망에 완전히 휘둘려야 하는 것. 발몽에겐 그것이 사랑이었다. 그런 바보 같은 사랑에 휘말리는 것 자체가 발몽에겐 치욕이었다. 메르테이유 부인은 발몽의 그런 지독한 에고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메르테이유 부인 또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인정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랑의 불가항력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었다.
사람들이 ‘사랑을 선택하다’고 하지 않고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한 언어습관이다. 사랑은 주체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이기에. 발몽은 투르벨 부인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듦으로써 그녀가 믿었던 모든 고귀한 가치를 짓밟았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지만, 그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 이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자신이 처음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토록 경멸하던,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랑에 빠졌음을. 사랑 때문에 나다운 것을 잃었을 때, 나라고 믿었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오히려 미친 듯이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다. 발몽은 아직 그 바보 같은 행복을 인정할 수 없다.
나의 천사여, 어차피 사람이란 어떤 일이든 시간이 가면 지겨워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죠. 내 탓이 아닙니다. 지난 넉 달 동안 미칠 듯이 열중했던 연애가 이제 와서 시들해진 건 내 탓이 아닙니다. (…) 나는 얼마 전부터 당신을 속였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당신이 너무나 다정했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내 탓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미칠 듯이 좋아하는 어떤 여인이 당신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그건 내 탓이 아닙니다.
(…) 내 말을 믿고, 다른 애인을 택하십시오. 나도 이미 다른 애인을 찾았습니다. 아주 좋은 충고이지만, 혹시 그대가 보기에는 좋은 충고가 아니라면, 그건 내 탓이 아닙니다.
나의 천사여, 이제 그만 안녕히.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아무런 후회 없이 당신 곁을 떠납니다. 어쩌면 다시 당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그건 내 탓이 아닙니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 지음, 윤진 옮김, 『위험한 관계』, 문학과지성사, 4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