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vs 『위험한 관계』 ⑦
나는 너를 연출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처녀였기 때문에 입도 떼지 못하고 꼼짝 않고 있었죠. 그런 처지를 이용해서 난 사람들을 관찰하고 사색했습니다. 열심히 얘기를 들려줘도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날 사람들은 둔하고 산만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바로 그동안 자기들이 감추려고 애쓰는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말이죠. 이런 유익한 호기심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동시에 나 자신을 감추는 법도 가르쳐주었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감추어야만 했기에, 나는 마음대로 시선을 움직일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듯한 시선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답니다. (……) 조금 슬퍼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심지어 즐거운 표정을 즐거운 표정을 짓는 법을 익힌 겁니다. (……) 마찬가지로 예기치 못했던 기쁨이 찾아올 때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도록 정성과 노력을 쏟았어요. 난 바로 이렇게 해서 당신도
놀라워하던 능력, 그러니까 표정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게 된 겁니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 윤진 옮김, 『위험한 관계』, 문학과지성사, 243쪽.
니체는 말한다. 허영심은 영혼의 피부라고. ‘허영심’이라는 그럴 듯한 외피로 덮여 있기에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은 그나마 견딜만한 것으로 느껴진다. 뼈와 살과 내장과 혈관이 피부에 둘러싸여 있어 인간의 모습이 참고 견딜만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메르테이유 부인의 ‘피부’는 바로 ‘표정’이다. 그녀의 표정관리기술, 그것은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조절하는 기술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 또한 완벽하게 포착하고 통제하는 기술을 포함한다. 그 허영의 가면이 벗겨지기 전까지의 메르테이유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랑에 빠진 귀족 여성들이 편지 한 통 마음 놓고 보낼 수 없던 시대에 메르테이유는 온갖 계략으로 점철된 변화무쌍한 편지를 통해 타인의 욕망을 지배하는 기술을 습득한다. 메르테이유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오로지 물고 물리는 아귀다툼의 세계, 사랑조차도 오직 탐욕만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다. 메르테이유가 사교계의 여왕이 될 수 있었던 비밀은 이렇게 자기감정은 철저히 숨기고 타인의 비밀을 간파해내는 정보수집과 편집의 능력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세실이나 투르벨 부인은 연기력이 너무 부족한, 진심 이외에는 다른 매력을 지니지 못한 애송이들이다. 천진무구한 세실은 메르테이유 부인에게 하소연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나쁘다고들 하는데, 왜 그런 거죠?”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한다는데요. 그렇다면 왜 저는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80쪽) 메르테이유의 눈에는 사랑이라는 하찮은 감정놀음에 결박당한 이 여인들의 고뇌가 가소로울 뿐이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을 ‘배우’로 만들어버리고, 자신은 ‘무대 뒤의 연출자’ 혹은 ‘시나리오 작가’로 숨어버리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나 감정 포착의 달인인 메르테이유도 몰랐던 사실이 있다. 배우는 수많은 역할을 연기하지만 결국에 가서 자기 자신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집 바깥에서는 누구나 연기를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마치 백스테이지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배우들처럼 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사비나는 인생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법을 오래 전에 마스터한 사람처럼 보인다. 사비나는 메르테이유 부인처럼 타인의 삶마저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려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을 제멋대로 즐기는 데는 도가 튼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비나에게도 지울 수 없는 무거움의 상처가 있다. 조금도 슬프지 않다고 믿었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토마스의 죽음은 사비나에게 있어 극복할 수 없는 무거운 상처가 된다. 한편 오직 무거움의 세계밖에 모르는 테레사는 가벼움조차 ‘학습’하려 한다. 그녀는 억지로 가벼움을 습득하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애교를 부리려고 노력해보지만 그 학습된 어색함은 남자들에게 당혹감을 준다.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집착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한다. 그녀가 ‘프라하의 봄’ 당시 찍었던 사진은 토마스가 아닌 존재에게도 열정을 다할 수 있다는 그녀의 잠재성을 실험하게 해주지만, 그 기쁨은 너무 빨리 허망하게 끝나버린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웨이트리스로 취직하고 그녀는 웨이트리스가 되자마자 ‘하지정맥류’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온종일 무거운 것을 들고 걷고 뛰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고질병, 하지정맥류. 그것은 테레사의 벗어날 수 없는 무거움을 상징하는 질병이다.
잡지사에서 해고당하자 그녀는 바텐더 자리를 얻었다. (……) 취리히에서 돌아온 몇 달 뒤 일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소련 탱크 사진을 찍었던 그녀를 용서하지 않은 셈이다. 그나마 친구들 덕분에 이 자리를 얻었다. 친구들 역시 그녀가 이 피난처를 찾은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자리를 잃었던 사람들이다. (……) 그녀는 다시 다리 때문에 겁이 났다. 지방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시절, 동료들의 발목에 정맥류가 솟은 것을 보고 경악했던 적이 있었다. 일생동안 무거운 것을 들고 걷고, 뛰고, 서 있어야 하는 모든 웨이트리스에게 흔히 있는 병이었다. (……) 그녀는 1시 30분에 집에 도착했다. 토마스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여자 냄새, 성기 냄새가 났다.
―밀란 쿤데라, 이재룡 옮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16~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