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vs 『위험한 관계』⑥
그 사랑 속에 ‘나’는 없다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즉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 프라하에서도 그녀가 토마스에게 의지하고 산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단지 심리적 의지였다. 여기에서 그녀는 모든 면에서 그에게 의지하며 산다. 만약 그로부터 버림받는다면
그녀는 여기서 무엇이 될까? 그녀는 일생 동안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할까?
―밀란 쿤데라, 이재룡 옮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125쪽.
테레사의 나약함은 그녀 자신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토마스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토마스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는 테레사의 신경쇠약은 토마스의 삶까지도 무력화시킨다. 테레사의 나약함은 그 자체로 놀라운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까지 파괴할 정도다. 테레사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자아실현과 토마스와의 사랑의 실현을 분리된 실체로 여긴다. 과연 그럴까. 나를 찾는 일과 사랑을 찾는 일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대척점에 있는 것일까. 쿤데라는 말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하나씩의 지옥을 선사했다고.
테레사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조국의 민주화운동 열기 속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세상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삶의 기쁨을 발견한다. 그녀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굳건한 경계를 뒤흔드는 무한한 열정을 발휘함으로써, 삶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그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다. ‘프라하의 봄’의 열기가 식어가자, 그녀가 사진으로 포착한 뜨거운 혁명의 순간들은 더 이상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열정을 바쳐 찍었던 사진들은 이제 교환가치가 없어져버렸다. 편집장은 그녀에게 ‘팔리는 사진’을 찍기를 요구했고, 그런 사진은 그녀가 원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 어디서도 삶의 구명줄을 찾지 못한 테레사. 사랑은 두 남녀가 함께 시작했지만 자신의 질투와 나약함에 스스로 몰락하고 있는 테레사는 그 사랑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한다. 그녀는 이 세상을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 바라본 나머지 사랑뿐 아니라 삶에도 때로는 ‘가벼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의 ‘무거움’만을 바라보는 테레사의 문제가 사랑을 절대화하는 것이라면, 사랑의 ‘가벼움’만을 움켜쥐려는 발몽의 문제는 사랑을 물질화시키는 것이다. 발몽은 사랑도 물건처럼 훔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교계의 제왕으로서의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발몽은 투르벨 부인에게 자신을 비방한 측근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투르벨 부인의 방을 직접 뒤지고, 그녀의 주머니까지 털 생각을 한다. “(그녀는) 헌금을 내듯이 사랑을 베풀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지 않으니 결국 훔칠 수밖에요.”(122쪽) 사랑을 헌금처럼 자비롭게 베풀 수 있는 ‘물질’로 생각하는 발몽. 사랑을 훔칠 수도 있고 빼앗을 수도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발몽의 치명적인 실수가 아니었을까. 그의 마음속에 바이러스처럼 파고든 사랑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물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투르벨 부인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스스로 사랑의 ‘고수’라 믿는 발몽은 사랑을 우습게 여김으로써 오히려 사랑의 치명적인 덫에 걸리고 만다. 도리어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열다섯 살 소녀 세실과 애송이 청년 당스니가 사랑의 ‘제맛’을 온몸으로 절절히 느끼고 있다. 세실과 당스니는 첫사랑의 낯선 풍경 앞에서 매번 발걸음을 멈추고 현기증을 느낀다. 첫사랑의 매력은 사랑의 성공이나 결과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과정 하나하나에 매혹된다는 것, 사랑이 선사하는 아주 사소한 디테일의 매혹에 매순간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첫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에 철저히 미숙하기 때문에 고수들보다 오히려 더 예민하게 사랑의 진풍경을 낱낱이 느낀다. 그녀를 못 만나는 고통도, 그녀와 함께 할 수 없는 고독조차 사랑의 놀라움,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인식된다.
사실 첫사랑은 언제나 고귀해 보이고, 말하자며 순수해 보이는 법이죠. 그런 경우 일에 진전이 느린 건 사람들이 생각하듯 섬세하거나 소심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 느껴보는 사랑이 놀라워서, 매순간 다가오는 매력을 즐기기 위해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멈춰서기 때문입니다. 그 매력은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강렬한 것이어서 다른 쾌락은 모두 잊게 만들어버리죠.
―쇼데를로 드 라클로, 윤진 옮김, 『위험한 관계』, 문학과 지성사, 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