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vs 『위험한 관계』②
남녀 사이, 에로틱한 우정은 가능할까
마음 속의 모든 비밀들을 알고 계시는 당신께.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가장 원대한 계획을 당신께 털어놓을까
합니다. 당신이 내게 무엇을 제안했죠? 아무 것도 본 적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처녀애를 유혹하라고요? 아무런 저항 없이 내게로 넘어올, 칭찬 한 마디에 도취되고 사랑보다는 호기심에 이끌릴 어린 소녀를 말입니까? 다른 그 누구라도 나처럼 성공할 수 있겠지요.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시도가 아닙니다. 그건 성공 시 내게 쾌락뿐 아니라 명예까지 보장되는 것이지요. (……) 투르벨 부인과 그녀의 신앙심, 부부애, 준엄한 원칙들을 알고 계시지요. 이것이 바로 내가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상대할 만한 적수, 내가 도달하려는 목표입니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 윤진 옮김, 『위험한 관계』, 문학과지성사, 2007, 36쪽
진지한 연애의 무거움을 쏙 빼버리고, 남녀 사이의 육체적 관능을 마음껏 즐기는 에로틱한 우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가 추구하는 사랑의 이상형은 바로 에로틱한 우정이다. 사랑의 장점과 우정의 장점만 정확하게 채취하여 이상적으로 조합한, 관계의 주인공에게 어떤 도덕적 책무도 요구하지 않는 가벼운 사랑. 『위험한 관계』의 발몽 또한 수많은 여성들과 그런 관계를 맺어왔다. 에로틱한 우정을 영속시키려는 발몽과 토마스의 공통점은 제멋대로 춤추는 ‘사랑의 리듬’을 자신들의 ‘삶의 리듬’에 맞게 통제하려 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모두 사랑을 남녀 간의 흥미로운 게임으로 본다. 사랑을 내가 만든 규칙에 따른 킬링타임용 게임으로 연출하는 것이 발몽과 토마스의 지상 목표다. 그러나 그들이 게임을 지속할수록 만나는 것은 통제 너머에 존재하는 충동, 게임 너머에 존재하는 숨길 수 없는 내 안의 타자다.
에로틱한 우정은 이 남성들에게 진지한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편리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 에로틱한 우정의 규약에 만족하지 못할 때, 관계는 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닌, 결국에는 한쪽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폭력이 되고 만다. 발몽은 아직 그 폭력, 사랑이라는 게임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 폭력의 끔찍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발몽은 이 게임의 치명적인 중독성을 마음껏 즐긴다. 그가 자신이 통제하는 사랑의 게임을 즐기는 방식은 바로 이 게임 자체를 더욱 위험천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통제하고 지휘할 수 있는 사랑의 게임, 그 게임의 법칙을 더욱 교묘하고 난해하게 만드는 것이 발몽의 전략이다. 메르퇴이유 백작 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에로틱한 우정을 지속하기 위해. 정숙함의 표본인 투르벨 부인이 ‘미끼’라면, 발몽 못지않게 에로틱한 우정의 대가인 메르퇴이유 백작 부인은 게임의 위너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트로피’였던 것이다. 그러나 투르벨 부인을 만나면서 발몽은 자신이 단지 목표물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투르벨 부인의 사랑이 어느새 자신의 최종 목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깨닫지만 인정하지 못한다. 그녀의 웃음소리, 그녀의 숨소리, 그녀의 체온이 바래다주는 순수한 낙원의 세계에 자신이 감염되어버린 사실을, 발몽은 좀처럼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나의 각본, 나의 연출, 나의 무대 위에서 오직 나만의 게임을 하는 것이니까. 이 게임에는 어떤 타자도 틈입할 수 없으니까. 적어도 난 지금 그렇게 믿으니까.
테레사와 사랑에 빠진 순간, 더 이상 수많은 여자들과의 에로틱한 우정을 마음 놓고 나눌 수 없게 된 토마스. ‘그의 가장 아름다운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토마스는 아직 모르지만 그 비극의 시작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했다. 이 여자에 대한 어떤 사전 지식도 없지만 이 여자 옆에서 지금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무릎 꿇고 키스하는 순간. 자신의 아들마저 하룻밤 섹스라는 철저한 우연의 산물로 생각하는 토마스, 이혼 후 아들과의 만남조차 가볍게 포기해버린 그가 처음으로 ‘Einmal ist keinmal(한 번 일어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의 세계,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무거운 의미를 두지 않으려는 순수한 가벼움의 세계에 치명적인 균열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녀의 행동은 점차 거칠어지고 일관성을 잃어갔다. 그녀가 토마스의 바람기를 발견한 지도 이 년이 지났고 그의 바람기는 더욱더 심해졌다. 도무지 해결책이 없었다.
뭐라고! 에로틱한 우정을 끊고 살 수 없다고? 그렇다. 그것이 없으면 그의 가슴은 찢어질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여자에 대한 탐욕을 자제할 힘이 없다. (……) 그것은 축구 경기 관람을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외도 속에 여전히 쾌감이 있었을까? 애인 중 하나를 만나러 집을 나서자마자 토마스는 그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고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곤 했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테레사의 모습을 떨쳐버리기 위해 빨리 술에 취해야만 했다. 테레사를 알고부터 술의 도움 없이는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그런데 입가에서 풍기는 술 냄새야말로 테레사가 가장 쉽사리 그의 바람을 눈치 채는 단서였다. 이제 그는 덫에 걸려든 것이다. 다른 여자들을 만나러 가려고 문을 나서면 욕망이 사라졌고 여자들이 없는 날이면 대번에 전화를 걸어 밀회 약속을 했다.
―밀란 쿤데라, 이재룡 옮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8~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