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vs 『위험한 관계』 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혹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랑
단 한 번 위험한 관계를 맺은 것이 이렇게 큰 불행을 초래하는 걸까요? 그 누가 전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아무리 엄청난 불행이라도 모두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남자가 유혹하는 말을 꺼내기만 해도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누가 딸에게 말을 걸면 바로 경각심을 가졌을 텐데!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언제나 일이 터진 후에 오는 법이죠.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진리, 가장 널리 알려진 진리이면서도 정작 결국 우리의 무분별한 풍속의 소용돌이 속에 묻혀버리고 아무 소용이 없게 되나 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우리의 이성은 불행을 경고해줄 능력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행을
위로해주지도 못한다는 걸 절실히 느낍니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 윤진 옮김, 『위험한 관계』, 문학과지성사, 2007, 546쪽
페이스북이나 미니홈피에 자신의 ‘프로필’을 깔끔하게 정리한 사람들을 보면 이제 우리 사회가 ‘자기소개의 달인들’을 길러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아주 짧은 몇 줄의 프로필만으로도 살아온 궤적과 자신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간략하고 효율적인 자기소개가 ‘경력’과 ‘능력’을 표현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런 프로필들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과 만난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까지 설명해주기는 어렵다.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정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가장 정직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해왔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랑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공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 살아가는 동안 쭉 만나야 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내 사랑의 일거수일투족’은 은밀하게 소통된다. 이 비밀의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생활마저 상품이 되어야 하는 현실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과 『위험한 관계』(쇼데를로 드 라클로). 이 두 편의 소설은 ‘사랑’ 앞에서는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무력함, 그러나 아름다운 무기력을 증명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스와 『위험한 관계』의 발몽은 수많은 여성들을 매혹시킨 천하의 바람둥이였다는 점만 서로 닮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이에게도 자신의 본심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희대의 포커 페이스였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평생 성공적으로 숨겨왔던 복잡다단한 속내를 들키고야 만다. 사랑 앞에서는 그 어떤 존재의 가면도 끝내 벗겨지고 만다는 것을, 이 매력적인 바람둥이들은 결국 인정하게 된다. 영화 <위험한 관계>에서 존 말코비치가 연기한 발몽이 “어쩔 수가 없어!(It is beyond my control)”라고 반복적으로 외치는 명장면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가 “그럴 수밖에 없어(Es muss sein)”을 되뇌는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연애의 달인’이었던 두 사람은 자기 앞에 혜성처럼 나타나 자신의 삶 전체를 뿌리째 뒤흔드는 진짜 ‘사랑’ 앞에서, 차마 ‘사랑의 달인’이 되지 못한 자신들의 서글픈 맨얼굴과 만나게 된다.
그녀를 깨울까 두려워 그는 그 손아귀에서 차마 손을 빼지 못하고 그녀를 자세히 보기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돌아누웠다. 이번에도 여전히 테레사가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버려진 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난폭한 강물에 띄워 보낼 수 있다니! 파라오의 딸이 어린 모세가 담긴 바구니를 강물에서 건져내지 않았다면 구약성서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우리 문명은 어찌 되었을까! 수많은 고대 신화의 도입부에는 버려진 아기를 구하는 누군가가 있다. 폴리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을!
그 당시 토마스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밀란 쿤데라, 이재룡 옮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쪽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테레사를 처음 본 순간 그녀가 ‘바구니에 담겨 버려진 아기’라는 은유를 떠올린 토마스. 그에게 비친 테레사가 그렇게 난폭한 강물에 버려진 무력한 아기로 비치는 한, 그는 그 수많은 신화의 ‘구원자’들처럼 바구니를 건져 아기를 키워야 하는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은유는 다르게 되고자 하는 욕망, 다른 존재와 얽히고 싶은 욕망, 다른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테레사가 ‘바구니에 담긴 아기’로, 토마스 자신은 역사 속의 수많은 ‘아기를 건져 올린 구원자’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테레사와 토마스 사이에는 아름다운 은유의 강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