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vs 『동물농장』 마지막회
욕망의 폐쇄회로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야후들은 다른 어떤 종족보다도 자기들끼리 더 미워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가
흉측하게 생긴 남의 결점은 보고 자기 결점은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인은 말했다.
―조너선 스위프트, 박용수 옮김, 『걸리버 여행기』, 문예출판사, 337쪽
걸리버는 왜 ‘말의 나라’에서 평생토록 살고 싶어 했을까. 그토록 그리워했던 가족을 다시 만났을 때, 왜 ‘인간의 흉측한 냄새’가 난다며 가족들이 자신의 몸을 만지지도 못하게 했을까.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속속들이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휴이넘의 유토피아적 삶의 원칙은 사실 간단하다. 나를 사랑하고 내 가족을 사랑하듯 타인을, 이웃을,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을 사랑하라는 것. 다른 모든 대단한 원칙들은 사족일 뿐이다. 사실 이것을 위해서는 ‘욕망의 포기’가 필요하다. ‘내 자식이 네 자식보다 잘나야 한다’는 욕망, ‘내가 너보다 빛나야 한다’는 욕망, ‘너의 통장 잔고보다 나의 통장 잔고가 많아야 한다’는 욕망이 없어져야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휴이넘은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욕망을 지혜롭게 ‘컨트롤’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그들은 살아있는 육체가 지닌 욕망을 컨트롤하기 위해 인구가 너무 늘어나지 않도록 출산을 조절하고, 정보가 과도하게 축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문자를 쓰지 않으면서 문명이 발달하는 것을 최대한 가로막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모델을 일찍이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유토피아적 이성’의 최고봉에 서 있던 휴이넘이 『동물농장』에서는 가장 우직하게 일하지만 가장 잔인하게 처벌당하는 비참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복서’다.
복서가 없었다면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복서의 힘은 다른 동물들 모두의 힘을 합한 것과 맞먹는 것처럼 보였다. 바위 덩어리가 미끄러지기 시작할 때면 동물들은 언덕 아래쪽으로 돌에 끌려 내려가며 절망적으로 소리쳤는데, 바로 그때마다 복서가 있는 힘을 다해 밧줄을 끌어당기며 버텨 결국 바위덩어리를 멈추게 했다. (……) 클로버가 때로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했지만, 복서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자신의 두 가지 좌우명인 ‘내가 좀 더 열심히 일하겠어’와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답인 듯 했다. 그는 수탉에게 다시 부탁하여 아침에 다른 동물들보다 삼십 분이 아니라, 사십오 분 일찍 깨워달라고 했다.
―조지 오웰, 최희섭 옮김, 『동물농장』,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87쪽
그저 묵묵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그저 열심히 내 한 몸 다 바쳐 일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떤 목표를 향해 어떤 욕망으로 어떤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복서의 우직한 열정은 아름답지만 어쩌면 독재자의 전횡만큼이나 ‘자유로운 존재들의 공동체’를 가로막는 강력한 내부의 적인지도 모른다. 복서의 좌우명은 두 가지였다. ‘내가 좀 더 열심히 일하겠어.’ 그리고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 이 두 가지 철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복서는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항상 옳다는 것은 분명 ‘틀린’ 전제였다. 주인의 자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삶, 삶의 가치가 주인에게 얼마나 열심히 복종하느냐로 결정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주인에게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히는 것도 나쁘지만 어떤 ‘주인’이든 그 존재가 ‘나 바깥’에 있다면 권리는, 자유는, 해방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생물과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욕망에 반(反)하는 ‘금욕’이 아니라 새로운 욕망의 회로를 개척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오직 자신들을 위해 일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노예처럼 힘든 노동 이 결코 힘들지 않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그것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금욕’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해도 내 것이기에 고통조차 즐거움이 되는’ 또 하나의 욕망의 경지가 된다. 걸리버가 휴이넘과 소통하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그는 소인국이나 거인국에 있을 때는 한결같이 ‘바라보는 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인간보다는 다소 열등해 보이는, 인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그들의 나라’에 대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의 자아 속에는 아직 ‘위대한 내 나라, 자랑스러운 내 조국, 위대한 나의 종족, 인간’이라는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존재하고 있었다.
말들의 나라에서 휴이넘과 함께 하면서, 야만성으로 들끓는 야후의 무리들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상대화’할 수 있게 되면서, 걸리버는 ‘인간에게 거리두기’ 하고 ‘타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새로운 욕망의 경지를 체험한다. 다르게 산다는 것, 그것은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것이고 다른 존재와 함께 하는 것이고 지금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틀림’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차이’로 인정하는 것이다. 『동물농장』과 『걸리버 여행기』는 단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라’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르게 살 수 있는 방식, 우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과 씨름할 수 있는 새로운 욕망의 회로를 개발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휴이넘들에게는 우애심이나 박애심이 중요한 미덕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러한 미덕은 특정한 휴이넘에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온 종족에게 적용된다. 아무리 먼 곳에서 온 휴이넘일지라도 가까운 이웃처럼 대하며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 고향인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들은 품격과 예의를 최대한 지킨다. 그렇지만 격식 같은 것은 모른다. 오직 이성의 지시에 따라서 자녀들을 가르친다. 나는 나의 주인이 이웃집 자식들에게도 자기 자식과 동일한 애정을 베풀어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종족을 다 위해주도록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조너선 스위프트, 박용수 옮김, 『걸리버 여행기』, 문예출판사, 3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