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vs 『동물농장』 ⑥
‘그것’이 아닌 ‘너’로 바라보기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
-조지 오웰, 최희섭 옮김, 『동물농장』,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53쪽
이 작품은 잘못 흘러간 혁명의 역사를 다룬다. 또한 혁명의 원칙을 왜곡할 때마다
동원했던 온갖 변명들의 역사를 살핀다.
-조지 오웰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우리가 ‘그것’이라고 불렀던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바꾸어 불러 보자고.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들을 ‘인간이 정한 명칭’이 아니라 ‘그대’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빨강머리 앤이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사물에 자기만의 독특한 이름을 붙여주며 애지중지했듯이. 앤이 이름 붙여주는 사물들은 나무 하나 다리 하나 호수 하나도 어김없이 특별한 존재가 되었듯이 말이다. 아이들은 강아지나 고양이는 물론 인형이나 물건, 심지어 땅바닥이나 하늘과도 종알종알 수다 보따리를 늘어놓는다. 잠깐 우리도 아이들 흉내를 내보자. 우리가 ‘그것’이라 불렀던 그 모든 것들을 잠시 ‘그대’라고 불러보자. 3인칭의 대상, 머나먼 타자였던 ‘그것’들은 2인칭의 소중한 이름, 부를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것’이라 불렀던 그 모든 것을 ‘그대’, ‘너’, ‘당신’으로 바꾸어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다. 꽃도 나무도 강아지도 컴퓨터도 밥도, 그리고 지금 여기서 영문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소들과 돼지들도…….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말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주체’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기입’되는 것이라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편견’도, 남자는 ‘남자답게’, 인형을 갖고 놀아서는 안 된다는 편견도, 여자는 ‘여자답게’, 전쟁놀이에 열광해서는 안 된다는 편견도, 모두 사회화 과정에서 인간의 ‘신체’에 ‘기입’되는 정보들이다. 『동물농장』과 『걸리버 여행기』가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제기라는 관점에서 오늘날 새롭게 다시 읽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많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있으니까. 인간에게는 기회균등의 원리라는 것이 적용되니까. 하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어느 나라에서 어떤 지방에서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는가에 따라 우리 인생의 ‘선택권’은 지극히 제한된다. 우리가 가장 ‘나답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외적 조건들은 물론 성격이나 인간관계까지도 우리가 처한 외부 조건들이 우리의 신체에 ‘기입’한 결과라면, 우리는 그 ‘기입된 정보’의 출처와 생성 과정을 알아내야 하지 않을까.
『동물농장』과 『걸리버 여행기』는 우리가 ‘명확한 주체’라고 믿고 있는 인간 존재의 허상을 낱낱이 해부한다. 우리가 ‘주체’라고 믿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폭력으로 ‘주체’의 자리를 꿰찼는지, 우리가 그저 ‘객체’ 또는 ‘타자’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어이없게 ‘무력한 대상’으로 전락했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아주 조금이나마 그 ‘기입된 주체성’의 허구를 엿볼 수 있다. 『동물농장』에서 노동 감독관을 자임하던 돼지들은 급기야 인간에게 투항하여 인간보다 더 악랄하게 동물들을 착취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인간의 친구’가 되어버린 돼지들의 배반에 신이 나서 외친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이 다뤄야 하는 하급 동물이 있듯, 우리에게는 하층민이 있습니다!”
걸리버는 휴이넘에게 인간, 아니 ‘우리나라의 야후들’이 사회라는 시스템을 제조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휴이넘은 ‘거짓말’이나 ‘화폐’, ‘낭비’나 ‘수입’ ‘불평등’ 같은 인간 사회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휴이넘의 나라에서는 거짓말도 필요 없고 화폐도 필요 없고 불평등 따위도 목격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걸리버는 이런 ‘인간적인’ 개념을 설명하면서 점점 자신도 모르게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거침없이 휘두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영국인’을 ‘우리나라의 야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자는 ‘숫야후’, 여자는 ‘암야후’라고 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인간 사회를 방어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되도록 좋게 말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 뚫려버린 것이다. 진정 걸리버는 ‘인간다움’, ‘인간 중심주의’에서 해방된 것일까.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야후들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쓰기에 족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설명해주었다. (……)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고생한 대가를 먹게 되는데, 가난한 야후 1천 명에 부자는 한 명 정도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야후들 대부분은 다만 몇 명을 잘 살게 해주려고 적은 임금을 받고서 매일 고된 일을 하며 비참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 우리나라 상류층의 암야후가 먹을 음식과 그것을 담을 그릇을 구하려면 지구를 적어도 세 바퀴 반은 돌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 우리나라 국민의 상당수는 못살기 때문에 거지질, 도둑질, 사기, 위증, 아부, 위조, 도박, 거짓말, 협박, 돈 받고 투표하는 것, 살인, 매춘, 모함 등등의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조너선 스위프트, 박용수 옮김, 『걸리버 여행기』, 문예출판사, 326~3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