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vs 『동물농장』⑤
에고이즘과의 유쾌한 결별
나는 5년 동안 인도 경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5년째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나는 내가 봉사하고 있지만 어쩌면 나로선 그 실체를 이해할 수 없는 제국주의를
무척이나 증오하게 되었다. (……) 나는 전제라고 하는 실제적인 기계의 한 부속품인
경찰에 몸담고 있었다. (……) 나는 속죄해야 하는 무거운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
나는 제국주의 뿐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로부터 벗어나야함을 느꼈다.
나는 억압받는 자들 사이로 내려가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그들의 편에 서서 압제자들에 항거하고 싶었다.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34~138쪽
외국에서 지진이나 테러가 일어나면 ‘다행히 한인 피해자는 없었습니다’라고 보도하는 언론. ‘머나먼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아직 민간인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보도하는 언론. 한인 피해자가 없다면, 민간인 피해자가 없다면, ‘우리’는 ‘다행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 우리나라 언론이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할 때는 유독 ‘그들의 나라’와 ‘지금, 여기’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저널리즘은 마치 ‘우리’가 걱정할 수 있는, 아니 걱정해야만 하는 존재의 한계를 정해놓은 것 같다. 마치 ‘이 테두리 바깥의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야 마음 편하다’는 듯, ‘한국인 뉴스 공동체’를 위한 인식의 마지노선을 정해 놓은 것일까.
그러나 ‘우리’라는 경계는 생각보다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외국 여행과 유학, 이민은 물론 이주 노동자와 국제결혼 인구가 갈수록 급증하는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우리’이고 어디까지가 ‘그들’인지를 구분하는 경계를 어떻게 선명하게 규정할 수 있을까. 『걸리버 여행기』와 『동물농장』은 ‘인간’의 경계, 나아가 ‘우리’라는 내집단의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인가를 보여준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아주 ‘살짝’만 바꿔도 ‘나’의 경계는 물론 ‘우리’의 경계는 순식간에 해체된다. 우리는 항상 세계를 바라보는 주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인간’의 눈에 비친 모든 ‘인간 이외의 것들’은 ‘그것’으로 전락한다. 언제든지 ‘우리’의 편의에 따라 ‘삭제’하고 ‘배제’할 수 있는 존재, ‘그것’으로.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간 아닌 존재에게 위협이 되어 왔는가.
‘우리를 착취하는 인간을 타도하자’는 구호 아래 단결한 동물농장 식구들을 보면서 우리는 단숨에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된다. ‘인간’이 아닌 소인, 거인, 말들이 주인공이 되는 나라에 불시착한 걸리버의 모험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주인공인 줄로만 알았던’ 이 세계가 불현듯 낯설어진다. 걸리버는 소인국에서 활보할 때만 해도 ‘인간이라는 우월감’을 버리지 않았다. 거인국에서도 자신의 조국을, 인간이라는 종족을 ‘피아르(PR)’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가 점점 다양한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만날수록,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는 경험을 통해,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욕망의 추악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이성을 가진 휴이넘을 보면서, 인간보다 훨씬 심플한 사회 제도만으로도 효과적으로 공동체를 운영하는 거인국 사람들을 보면서 걸리버는 서서히 자기 종족에 대한 열등감을 내면화하게 된다. 자기혐오는 단지 ‘자기부정’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걸리버의 유토피아적 전망은 말들의 나라에서 비로소 실현되고, 걸리버는 그곳이 자신이 ‘정착’할 곳이라고 여기게 된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결점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닐까. 그 능력을 쓰지 않는 한, 한 번 저지른 잘못을 또 다시 반복하면서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는 한, 인간은 ‘한 마리 야후’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비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많은 왕들이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거짓으로 기록되어 있고, 왕과 총리 사이의 대화를 꾸며서 기록해 놓았고, 고관들의 마음속을 파헤친다고 하면서 없는 일을 꾸며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건들의 본질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창녀 하나가 상원의원을 마음대로 조종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며, 어떤 장군은 자기가 승리를 거두게 된 원인이 실제로는 자기가 겁이 많고 작전을 잘못 수립했기 때문이었다고 나에게 고백했고, 어떤 해군 제독은,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여 원래는 항복을 하려고 했는데 상대방 함대를 격파해버렸다고 실토했다. 자기들이 통치한 기간 동안 한 번도 훌륭한 인물을 기용한 일이 없었다고 진술한 왕도 세 명이 나왔다. (……) 나는 영예로운 자리나 엄청난 재산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 그네들이 이용했다고 고백한 것들 중에서 위증, 고문, 매수, 사기 등과 같은 것은 약과에 속했다. 그렇지만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해서 높은 자리와 부를 얻었다고 하거나, 자기 아내나 딸에게 매춘을 시켰다거나, 자기 나라나 왕을 배신하거나, 독살을 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모함해서 그런 것을 누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우리 같은 하층 사람들이야 어떻든 그들을 공경하도록 되어 있지만,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시에 사라졌다.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문예출판사, 253~2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