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vs 『동물농장』 ④
야후와 포스트휴먼 사이에서
너희 종족(인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우연히 이성을 조금만 갖고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구나. 그런데 너희들은 점점 더 타락하고 악랄해지는 용도 외에는 그런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부여받은 얼마 안 되는 이성적인 능력을 스스로 버리고서,
원래 타고난 결점을 증대시키고 보충하는 일로 한평생을 헛되이 보내는구나. 너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보통의 야후 같은 힘이나 동작의 민첩함도 없고 뒷다리로 불안하게 걸어 다니고
발톱을 이용해서 너를 방어하거나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없고 햇빛이나 비를 막도록
되어 있는 수염을 잘라버려서 불안하다. 그리고 너는 이 나라의 야후들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고 나무에 신속하게 오를 수도 없다.
-조너선 스위프트, 박용수 옮김, 『걸리버 여행기』, 문예출판사, 2010, 336~337쪽.
말의 나라에서 걸리버가 존경해마지 않았던 ‘위대한 말’, 휴이넘의 목소리다. 휴이넘은 걸리버가 영국의 법률과 제도, 영국인의 풍속과 일상을 이야기하자 당대 최고의 문명국가를 자랑하던 영국인의 약점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졸지에 인류를 대표하여 인간에게 할당되는 모든 비난을 감당하게 된 영국인들. 휴이넘은 인간이야말로 ‘야후’보다도 민첩하지 못하고, 휴이넘보다도 ‘이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인간은 휴이넘의 지혜나 감성을 따라잡을 수 없고, 인간보다 동물에 가까운 야후들에 비해 ‘동물성’조차 부족하다. 이성도 동물성도 부족한 어정쩡한 존재, 그것이 너희들 인간이라는 종족이라니. 걸리버는 아연실색하지만 휴이넘이 이룩해놓은 이상적인 문명에 탄복하고, 영원히 휴이넘의 나라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기까지 한다. 이제 그만 이 나라를 떠나달라는 휴이넘의 부탁을 받자 걸리버는 급기야 혼절해버린다. 걸리버가 거인국과 소인국, 날아다니는 섬의 나라 등등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인류’라는 거대한 우물 안에 갇힌 자신의 한없는 왜소함이었다.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와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ayles)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은 ‘인간이 다른 생물체보다 우월하다’라는 편견으로 무장한, 자칭 문명국가들의 오랜 인간중심주의를 고발했다. 포스트휴먼을 꿈꾸는 수많은 논의들은 단지 인간중심주의만을 넘어서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풍요로운 소통 가능성, 나아가 인간과 다른 생물체들 간의 연대와 공생을 추구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포스트휴먼이란 단지 사이보그 제조나 생명연장기술을 통해 ‘인간 존재를 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형, 나아가 인간 이외의 타자를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추구한다. 이솝 우화처럼 동물을 단지 ‘인간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정심으로 감상주의에 빠지는 밤비 콤플렉스(Bambi Complex)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의 제한된 소통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든 노력, 인간 중심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몸부림. 그것이 포스트휴먼의 새로운 이상이다.
우리는 인간의 굴레를 넘어, 스스로의 동물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지혜를 잃어버리지 않는, 제3의 삶을 꿈꿀 수 있을까. 단지 동물을 모방하거나 동물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설 수 있을까. 동물과 인간이 서로를 촉발하고 변용하면서 동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새로운 포스트휴먼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인간이 외따로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한다는 착각을 버리고 인간이 거대한 생태계에서 다른 모든 존재들과 똑같이 생태계라는 그물을 구성하는 ‘단 하나의 그물코’라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모비딕』의 에이허브 선장은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린 고래에게 복수하기 위해 목수에게 고래의 뼈로 의족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런 깨달음에 이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연관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는 깨달음, 우리의 삶이 속속들이 이토록 거대한 생태계의 ‘빚더미’ 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뼈아픈 통찰. “인간의 삶이 서로서로 빚지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 삶의 대차대조표에 잔고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저주스러운 일이다. 나는 대기와 같이 자유롭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전 세계의 대차 장부에 이미 기입되어 있구나!” 하지만 이런 깨달음을 온몸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다. 『동물농장』의 식구들도 처음에는 ‘인간을 배척하라!’라는 선정적인 구호 덕분에 순식간에 결속력을 가지긴 했지만 그들 또한 너무도 인간적인 고민에 부딪힌다. 동물들이 ‘인간적인’ 고민을 하는 순간, 동물들이 의견 충돌과 권력 다툼으로 세력화되는 순간, 인간에게 억압받지 않아도 동물들 스스로 자신들을 속박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풍차 건설 문제를 둘러싸고 농장식구들은 두 패로 완전히 분열되었다. 스노볼은 풍차가 건설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리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 그렇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일 년 안에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연후에 일단 풍차가 완성되면 노동력이 크게 줄어들어 모든 동물들이 일주일에 삼 일 만 일하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반면에 나폴레옹은 지금 당장 해야 할 가장 필요한 일은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만일 농장 식구들이 풍차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하면 모두 굶어죽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농장의 동물들은 각각 ‘스노볼에게 투표하여 주 삼 일 노동을’ 또는 ‘나폴레옹에게 투표하여 배불리 여물을’이라는 구호 아래 두 파벌로 갈라졌다. 벤저민은 어느 파벌도 편들지 않는 유일한 동물이었다. 그는 식량이 더 풍부해질 것이라는 말도, 풍차가 노동 시간을 줄여줄 것이라는 말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풍차가 있건 없건 삶은 예전처럼 흘러갈 것이라고, 다시 말해 변함없이 어려울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조지 오웰, 최희섭 옮김, 『동물농장』,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76~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