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vs 『동물농장』③
호모 사피엔스의 우울증
인간을 제거합시다. 그러기만 하면 우리가 수고하여 생산한 것들이 모두 우리 자신의 것이
될 거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렇지요. 밤이나 낮이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인간을 무찌르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동무들,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오.
혁명! (……) 인간과 동물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인간의 번영이 동물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헛소리에 결코 귀 기울이지 마시오. 이러한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오.
(……) 우리 동물들은 이 투쟁에서 철저하게 단결하고, 철저한 동지애를 가져야 하오.
모든 인간은 적이오. 모든 동물은 동무요.
-조지 오웰, 최희섭 옮김, 『동물농장』,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35~36쪽.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성과가 속속 대중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엄청난 놀라움과 함께 커다란 실망감도 감추지 못했다. 바로 인간의 유전자가 초파리의 유전자나 원숭이의 유전자, 생쥐의 유전자와 특별한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인간의 유전자 개수가 초파리의 유전자 개수보다 수천 배 많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인간은 단지 먹고 자고 싸는 ‘동물’이 아니라 고도의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동물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 증명 받고 싶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추켜세우는 인간중심주의 프로젝트 이면에는 동물을 ‘가축’이나 ‘애완동물’로 격하시키고, 동물의 존재 자체를 폄하하는 각종 욕설과 속담을 만들어내는 ‘동물 폄하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호모 사피엔스, 호모 폴리티쿠스, 호모 모빌리쿠스는 과연 개, 돼지, 소, 닭, 염소, 개미, 꿀벌보다 우월한 존재인 것일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인간 vs 동물의 적대적 관계를 극단화함으로써 단지 러시아 혁명을 풍자한 것이 아니라 강자 vs 약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고발한다. 『동물농장』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진다. 우리는 『동물농장』을 보며 ‘동물’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동시에 체험한다. 우리는 혁명을 꿈꾸는 동물보다는 ‘강자’일지 모르지만, 점점 더 양극화되어가는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의 설 자리를 매번 의심해야 하는 ‘잠재적 약자들’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점점 공고해지는 사회 자체가 점점 거대한 판옵티콘으로 변모해가는 것을 느낀다. 도시인은 하루에 80회 이상 CCTV 감시카메라에 찍히는 어엿한 ‘연기자’로 거듭났다. 누군가 우리의 ‘안전’뿐 아니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자체를 감시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정작 보호받는 것은 ‘우리의 인권’이 아니라 ‘저들의 정보 통제 시스템’이다.
걸리버는 여행 초기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애국심을 발휘하여 자신의 조국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벌였다. 소인국 사람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크기의 거대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영국을 소개하며 자부심을 느꼈고, 거인국 국왕에게 자신과 똑같은 크기의 조그마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영국의 놀라운 문명을 소개하며 뿌듯해 했다. 그러나 여행을 계속할수록 걸리버는 조국을 향한 애국심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인간 세상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는 그의 무의식적 전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소인국, 거인국, 말들의 나라,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등등 그가 여행한 모든 곳에서 인간보다 훨씬 나은, 인간중심주의를 위협하는 우월한 존재들의 눈부신 대활약을 목격한다. 걸리버는 급기야 인간혐오증에 걸릴 정도로 인간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걸리버는 말의 나라에서 돌아온 후 심지어 그리운 가족들마저 멀리하고, 인간 세상과 멀리 떨어진 채 마구간에 종마를 사들인 후 그 말들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눈다. 인간보다 높은 지적 능력을 지닌 휴이넘(馬)의 세계를 목격한 후, 그는 한 마리의 ‘야후(yahoo)’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나의 조그만 친구여, 자네는 자네 조국에 대해서 칭찬을 했네. 고관이 될 조건은 사악한 마음씨라는 점을 입증해주었네. 법을 악용하는 데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재판관이 된다는 사실도 입증해주었네. 자네 나라에서는 어떤 제도가 시작은 훌륭했지만 결국에는 부패로 인해서 빛이 바랜 걸로 보이네. 자네가 말한 것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이 어떤 지위를 얻는 데는 그 방면의 학식으로 얻는 것 같지도 않고, 성직자들은 신앙심이나 학식으로 인해서 진급하는 것 같지도 않고, 군인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진급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의회의 의원들은 애국심으로써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 같지도 않네. 자네는 여러 해 동안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보냈으니 자네 나라의 악에 물들지 않았으면 하네. 내가 자네 이야기를 들어보고 판단한 바로는, 자네 나라의 인간들은 자연이 이제껏 이 지구상에서 기어 다닐 수 있게 만들어준 벌레들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벌레들이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네.
-조너선 스위프트, 박용수 옮김, 『걸리버 여행기』, 문예출판사, 167~1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