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박사와 하이드』 vs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⑧
파괴적 나르시시즘, 자아를 파괴하는 사랑
추악함이야말로 유일한 실체였다. 상스러운 말다툼, 추잡한 소굴, 무질서한 삶의 잔인한 폭력,
도둑과 부랑자의 바로 그 비열함까지도 예술의 모든 우아한 형태,
그리고 시문의 근사한 환영보다 더 생생했다.
-오스카 와일드, 김진석 옮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304쪽
지킬과 그레이는 주체의 파행적 자기 분열을 나타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새롭게 구성되기에 언제든 변형 가능한 주체의 신비를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저마다의 가슴 속에 웅크린 우울한 하이드나,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셀카의 이미지나 동영상,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비롯한 각종 1인 미디어를 통해 스스로의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바람직한 그림자’를 만들어 가끔은 스스로의 ‘그림자’에 종속되곤 한다.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나’에 대한 집착이 바로 그것이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그림자인 ‘위대한 기사’의 이미지에 중독되고, 마침내 자신의 그림자 이미지에 종속되어버린 첫 번째 주인공이었다. 사람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 자신의 분신, 그림자를 만들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그 그림자 이미지에 사로잡히곤 한다.
지킬은 하이드의 모든 죄악을 끌어안은 채 죽어가고, 각종 범죄의 주인공이 된 도리언은 ‘초상화’에게 아름다움을 되돌려준 채로 추악한 노인의 모습으로 죽어간다. 이 모든 참극은 어쩌면 자아에 대한 지나친 사랑,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완벽한 사회적 자아를 향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지킬은 ‘모범생’이자 ‘우등생’으로서 충족될 수 없는 ‘어두운 욕망’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외모를 향한 찬탄에서 비롯된 탐미주의를 세상 전체에 적용하려다가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이들의 나르시시즘은 자긍심의 표출로 시작되었지만, 타인의 존재까지 위협하는 극단적 나르시시즘은 결국 자신의 존재까지도 파괴하게 된다. 지킬 박사와 도리언 그레이, 두 사람은 자신의 효율적인 아바타를 만들고자 했지만, 도리언은 오히려 초상화의 아바타가 되었고, 지킬은 도리어 하이드의 아바타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해낸 분신의 멈출 수 없는 욕망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지킬과 하이드, 도리언과 초상화. 각각의 ‘커플’은 ‘원본’과 ‘복제’의 관계로 시작했지만, ‘복제’가 ‘원본’의 삶을 압도함으로써 무엇이 원본인지 무엇이 복제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 자잘한 호기심과 하찮은 탐욕으로 시작된 범죄들은 걷잡을 수 없는 죄악으로 치닫고 결국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그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에 도달한다. 지킬은 하이드를 없애려 하지만 결국 지킬 자신을 없애야만 하이드를 없앨 수 있음을 깨닫고, 도리언 그레이는 초상화의 창조자 바질을 죽이고 초상화 자체를 없애려 하지만 초상화를 찌르는 순간 자신이라는 ‘원본’의 육체가 종말을 맞는다. 도리언 그레이와 지킬 박사는 도시인의 ‘소시민적 삶’ 속에 감춰진 우울과 광기, 그리고 ‘소시민적 삶’에 갇힌 사람들이 저지를 용기가 없어 저지르지 못하는 모든 죄악들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극단적인 미를 추구하는 도리언 그레이, 극단적인 추악함을 추구하는 지킬 박사. 그들이 추구하는 극단적인 미와 추는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일상적인 자아, 범상한 삶에 만족할 수 없는 그들은 ‘극단’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삶의 권태로부터 탈주하려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의 자아,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 안에도 본래 수많은 자아가 함축되어 있다. 한 사람의 자아 안에는 수많은 유아, 아동, 청년, 장년, 노년의 삶이 압축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수많은 사회적 역할이나 분열된 인격들이 함축되어 있다. 누구나 자기 삶 안에 감당하기 어려운 ‘타자’의 삶을 끌어안고 있다. 지킬과 도리언은 자기 안의 타자를 또 다른 실체로 ‘외화’함으로써 자기 안의 타자를 추방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 안의 노년을, 우리 안의 유년을, 우리 안의 수많은 또 다른 자아를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까. 다중인격은 고통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다. 모두의 삶에서 숨 쉬고 있는 ‘창조적 다중인격’을 향한 열망을 타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인격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하나의 일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우리 안의 자아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마음의 놀이터를 개발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일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다. 드디어 한계선에 도달했다. 악마에게 잠시 굴복한 것이 결국 내 영혼의 균형을 파괴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았다. 줄어든 내 수족 위로 옷이 헐렁하게 걸쳐져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손엔 핏줄이 두드러지고 털이 무성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에드워드 하이드였다. 조금 전만 해도 나는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부를 지닌 훌륭한 사람이었다. 집에선 나를 위해 식당에 테이블보를 새로 깔고 식사 준비를 해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세상 사람 모두의 사냥감이 되어 추적당하고 있다. 집도 없는, 천하가 다 아는 살인자가 되어 교수대에 끌려갈 위험에 처해버렸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박찬원 옮김, 『지킬 박사와 하이드』,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22~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