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박사와 하이드』 vs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⑤
나는 왜 ‘나 아닌 존재’가 되고 싶은가
하이드는 지킬에게 무관심했다. 아니면 그저 산적이 쫓기다가 잠시 몸을 피했던 동굴을 기억하는
정도로만 지킬을 기억했다. 지킬이 아버지 이상으로 관심을 가졌다면 하이드는 아들 이상으로
무심했다. 지킬과 운명을 같이 한다면, 내가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빠져 있었으며 최근 들어
만족시키기 시작한 모든 욕구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반면, 하이드와 운명을 같이 한다면,
수많은 관심사와 열망을 버리고 갑자기, 그리고 영원히 멸시당하며 친구도 없이 살게 될 것이다.
당연히 한쪽으로 기우는, 공평하지 않은 거래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비교에는 또 다른
고려사항이 있었다. 즉, 지킬은 그 모든 것을 절연하는 고난 속에서 지독한 고통을 느끼겠지만,
하이드는 자신이 잃어버린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지낼 것이라는 점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박찬원 옮김, 『지킬 박사와 하이드』,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18쪽
인생은 이모작, 아니 삼모작이라는 인식이 대중화될 정도로, 이제 ‘1인분’의 삶에 담을 수 있는 콘텐츠는 방대해졌다. 평균수명이 급속도로 연장되면서 ‘노후’의 개념은 인생의 ‘황혼’이 아니라 ‘제2의 시작’으로 바뀌었다. 한 번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을 실제로 이루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직업도 바꾸고 사는 곳도 바꾸고 스타일이나 성격도 바꿈으로써 ‘나’이지만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 자기 존재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리모델링’하고 싶은 욕구는 젊은 세대에게도 유행처럼 번져간다. 평생 직장의 개념 자체가 사라져가는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이직(移職)을 일종의 능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꿈꾸며 제2, 제3의 취직을 앞다투어 준비하고 예찬한다. 우리는 왜 이토록 자신의 삶, 자신이 일군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지킬 박사와 도리언 그레이.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삶에 평생 만족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비극을 일찍이 간파했다. 늘 타인을 부러워하고, 나 자신의 결핍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걸핏하면 ‘대단한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불안과 우울.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나오는 음산하고 침울한 도시의 풍경은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의 끔찍한 간극을 보여준다. 도시인들은 이웃과 멀어지고 자기 자신의 일터와 멀어졌으며, 빨래터나 이발소에서 사람 냄새 나는 소문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매스 미디어가 제조하고 통제하는 ‘뉴스’를 듣는다.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살아온 것처럼 어린 시절 자신의 진정한 꿈이나 소박한 욕망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게 된다.
지킬 박사는 자신의 명예와 명성에 중독된 나머지 ‘체면’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하는 법을 망각해버린다. 욕망의 앞문과 뒷문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마음의 앞문으로 들어온 욕망은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뒷문으로 은밀하게 빠져나간다. 그렇게 마음의 뒷문으로 빠져나간 ‘부끄러운’ 욕망의 총집합이 바로 하이드다. 지킬은 자신의 은밀한 욕망(부도덕하게 살고 싶은 욕망,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리낌 없이 악행을 저지르고 싶은 욕망)을 해소할 출구를 찾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행위의 ‘쾌락’만을 느끼고 행위의 ‘책임’을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자아의 대체제, 하이드를 창조하게 된다.
그림을 지켜보는 것은 진실로 즐거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 은밀한 곳으로 따라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초상화는 그에게 최고의 마법 거울과도 같을 것이다. 마치 그의 육체를 보여 주듯이 그 자신의 영혼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닥쳤을 때조차 그는 여전히 여름의 문턱에 서서 전율하는 봄을 만끽할 것이다. 그의 얼굴에 혈색이 걷히고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창백한 가면이 드리울 때조차 매혹적인 청년 시절의 모습을 간직할 것이다. 사랑스러운 그의 청춘은 조금도 시들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맥박도 절대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신들처럼 강하고 날쌔며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캔버스 위의 색칠한 그림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뭐가 대수인가? 그 자신은 안전할 것이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오스카 와일드, 김진석 옮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