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박사와 하이드』 vs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④
아바타 콤플렉스
내가 아는 건 오직 그림자였는데, 난 그걸 실제라고 생각한 거예요. (…)
난 그림자에는 넌더리가 나요.
-오스카 와일드, 박찬원 옮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166쪽
‘아바타 소개팅’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본체’와 ‘분신’ 사이의 흥미로운 역학관계가 펼쳐진다. 이미 결혼을 했기에 이제 더 이상 실제로 소개팅을 할 수 없는 유부남들 vs 그들을 대신하여 젊고 매력적인 육체로 소개팅에 나가는 젊은이들. 그 사이에는 ‘정신’과 ‘육체’의 갈등이라는 본질이 있다. 유부남들이 젊은이들을 무선 마이크로 ‘조종’하지만 ‘아바타’이면서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분신’들은 그들의 명령을 필요에 따라 수긍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은 ‘형제애’를 매개로 ‘주체’와 ‘분신’의 관계를 설정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소개팅 실전에서는 ‘형제애’보다는 ‘미묘한 위계 싸움’이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이제 더 이상 소개팅을 나갈 수 없기에 ‘살아있는 분신’인 아바타를 마음껏 좌지우지하며 자신의 장난스런 욕구를 분출하는 유부남들의 모습은 폭소를 자아내면서도 어쩐지 서글픈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설정’이지만 우리 사회의 슬픈 알레고리 같기도 하다.
자신의 ‘분신’을 통해 대리만족을 꿈꾸는 현대인들. 부모들은 아이에게 자신의 ‘업그레이드 버전’의 분신이 되기를 요구하고, 아이들은 게임 속 아바타가 자신이 한 번도 살아보진 못한 멋진 인생을 대신 살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투사(projection)는 비극의 씨앗을 내포한다. 부모는 자식에게서 자신의 분신을 보지만 자식은 부모라는 존재의 기원에서 어떻게든 해방되고자 몸부림친다. 대리만족은 멈출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일시적인 진통제일 뿐이다. 대리만족은 본질적으로 ‘만족’이 아니라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육체가 느끼는 생생한 만족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완벽한 분신도 만들 수 없다. 복제 인간을 향한 인류의 SF적 상상력은 바로 이런 비극적 욕망의 우화다. 나의 피로와 나의 욕구불만을 대체해줄 완벽한 분신은 나와 유전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존재인 클론이겠지만, 클론이 아무리 원본과 동일한 유전자 구조를 갖더라도 그는 ‘또 하나의 나’가 아니라 나와 똑같은 외양을 지닌, 나를 닮아서 더욱 두려운 ‘독립된 타자’가 되는 것이다. 지킬이 하이드를 창조할 때, 도리안 그레이가 자신의 초상화에 주문을 걸 때, 그 둘은 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지 못했다.
도리언 그레이가 헨리와 바질을 만나기 전,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무심했다. 그러나 바질이 그레이의 완벽한 초상화를 그린 후, 그레이의 아름다움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헨리를 만난 후. 도리언 그레이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마치 예술작품처럼 대하기 시작했으며, 초상화가 자신의 완벽한 육체 ‘대신’ 늙어주기를, 그러니까 초상화가 그의 부정적인 아바타가 되어주기를 바랬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가 한 여자의 마음을 거침없이 짓밟고 돌아온 날, 초상화는 잔인한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표정과 행위에 따라 반응하는 초상화를 발견하고, 충격에 휩싸인다. 이제 이 초상화는 마치 ‘도덕의 금전출납부’처럼 그의 행위에 따라 반응하게 된 것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현혹된 나머지, 그 찰나성에 절망한 나머지, 초상화라는 아바타를 통해 자신의 ‘진짜 삶’을 대리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이제 자유로워진 것일까. 늙고 병들어 추해진다는 공포로부터 해방된다면, 그의 삶은 더없이 행복해지는 것일까.
초상화의 얼굴은 약간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표정이 달랐다.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 초상화의 얼굴에는 그가 포착했던 표정이 남아 있었고 더 강렬해진 것 같았다. (…) 그는 자신이 젊음을 간직하고, 초상화가 대신 늙으면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소원을 말했었다. 그 자신의 아름다움은 훼손되지 않고, 캔버스에 그려진 얼굴이 그의 열정과 죄악의 무게를 짊어졌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림 속의 인물이 고통과 번뇌의 주름살을 갖게 되고, 그는 단지 젊음을 연상시키는 미묘한 혈색과 사랑스러움을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 무한한 연민의 느낌,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림 속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연민이 그를 덮쳐왔다. 그림은 이미 변했고 계속 변할 것이다. 금발은 회색빛으로 퇴색할 것이다. 붉고 흰 장미는 시들어 죽을 것이다. 그가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얼룩으로 더럽혀지고, 그 아름다움을 파괴할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박찬원 옮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71~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