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박사와 하이드』 vs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③
분신, 나보다 더 나다운 존재?
감각이 뭔가 낯설었다. 뭔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웠고, 그 새로움 때문인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내 육체는 더 젊어지고 더 가벼워지고 더 행복해졌다. 나는 그 육체 안에서 마치 환상 속에서 물방아에 물이 흐르듯 무모한 무분별과 무질서한 관능적 이미지의 물결이 흐르는 것을 의식했다. 책임감이 녹아 사라지고,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결코 순수하지 않은 영혼의 자유로움도 인식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생명을 처음 호흡하자마자 나는 내 자신이 더욱 사악해져서, 열 배는 더 사악해져서
내 깊은 곳의 악마에게 노예로 팔렸음을 알아차렸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브슨, 박찬원 옮김, 『지킬박사와 하이드』,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09쪽
오늘날에는 ‘게임의 아바타’와 ‘블로그’와 ‘미니홈피’ 등이 현대인의 자연스러운 ‘분신’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디지털화된 ‘분신’을 통해 자신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전시한다. 초상화에서 사진으로 사진에서 아바타, 블로그 등으로 변천되는 ‘자아 표현 장치의 역사’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마음에 드는 모습을 세상에 남기는 것(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다채로운 변장, 위장, 과장의 기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최고의 이미지’를 남기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복제된 이미지’가 오히려 ‘원본의 삶’을 제약하기도 한다. 게임의 아바타에 들이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뿐 아니라 미니홈피로 인한 사생활 침해는 새로운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하나의 자아’로 만족할 수 없는 현대인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이버 분신’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창조된 분신은 과연 얼마나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 것일까.
도리언 그레이와 지킬 박사는 이러한 ‘분신’과 ‘복제’의 문제를 이미 디지털 미디어 시대 이전에 깨달은 불행한 얼리 어댑터(?)들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에 매혹되고 지킬 박사는 자신의 사악한 분신 하이드에 매혹된다. 헨리가 그레이에게 갖는 열정은 예술 작품을 향한 수집가의 열정처럼 탐미주의적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아름다움에 반한 헨리는 그 ‘아름다움’에 집착하고 그의 아름다움이 영원히 퇴색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지나친 동경과 집착이 도리언 그레이의 끔찍한 불행을 예고한다. 한편 지킬 박사는 ‘도덕적 자아’를 고수하기 위해 희생했던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하이드’를 통해 실현시키고자 한다. 지킬은 하이드를 통해 ‘남에겐 보일 수 없지만, 나 자신만 은밀하게 만족하는 자아’를 향한 욕망을 투사한다.
지킬이 하이드가 되는 순간 가장 큰 해방감은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다. 하이드가 되는 순간, 그는 ‘신사’가 될 필요도 없고 ‘유명인사’의 체면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범죄’의 책임조차 회피해버릴 수 있다. 지킬은 화학 약품 처리만 잘 하면 지킬 되기와 하이드 되기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점점 하이드는 지킬의 관리와 통제를 벗어난다. 처음에는 우아한 지킬의 억압된 욕망을 대리충족해주던 하이드가, 이제는 ‘원본’인 지킬의 사생활을 위협하는, ‘주체’와 ‘분신’의 역전이 일어난다. 광기와 야만의 화신 하이드는 한때 최고의 젠틀맨이었던 지킬의 마지노선, 그의 마지막 이성과 자존까지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바질 홀워드와 그 밖의 다른 많은 사람들까지 매료시켰던 그의 놀라운 아름다움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그가 누린 기쁨의 이유였다. 도리언과 관련해 가장 사악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때때로 그의 생활양식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런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고 여러 클럽에서 이야깃거리가 되는데도, 정작 그를 보게 되면 그의 치욕스러운 일들을 하나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천하게 떠들어대던 사람들은 도리언 그레이가 방에 들어오면 조용해졌다. 청순한 그의 얼굴에는 그들을 나무라는 뭔가가 있었다. 그와 자리를 같이 하기만 해도 사람들은 이미 더럽혀진 자신들의 순결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오스카 와일드, 김진석 옮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