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박사와 하이드』 vs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②
당신의 아바타는 안전하십니까?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유혹을 인정하는 거죠. 그것에 저항하려 들면, 당신의 영혼은 스스로
금지한 것에 대한 갈망과 (…) 욕구 때문에 점차 병들게 돼요. 세상에서 가장 큰 사건은 두뇌에서
일어난다고들 말하죠. 두뇌에서, 오직 두뇌 속에서만 세상의 크나큰 죄악이 발생한다는 거요.
-오스카 와일드, 김진석 옮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68쪽
헨리 지킬은 때때로 에드워드 하이드가 저지른 일들 앞에서 아연실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통상적인 법망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교묘히 양심의 가책을 벗어났다. 죄를 지은 것은 어쨌든
하이드였고, 하이드 홀로이지 않은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킬의 선한 기질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깨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경우에는 하이드가 저지른 악행을 급히 고쳐놓으려고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양심이 편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박찬원 옮김, 『지킬 박사와 하이드』,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14쪽
미니홈피, 아바타, 블로그, 그리고 트위터. 현대인의 일상과 정체성을 ‘대리’하게 된 첨단 장치들은 자기 자신조차 광고와 매니지먼트의 대상으로 삼는 현대인의 자기 표현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이러한 자기 표현 욕망은 단지 ‘나를 대체하는, 그러나 나보다 훨씬 나은’ 아바타적 자아를 창조하는 것을 뛰어넘는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각종 1인 미디어를 통해 ‘하나가 아닌 나’, ‘여러 개의 나’를 향유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의 아바타는, 우리의 블로그는 ‘보기에’ 좋은가. 아니 우리는 우리의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보기 좋게 관리하느라, 흙탕물 가득한 실제 세계를, 아름답게 포장할 수만은 없는 진짜 삶을 위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킬 박사는 매너 좋고 사람 좋기로 이름난 유명인사일 뿐 아니라 각종 자선사업으로도 정평이 나 있는, 런던의 셀러브리티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에게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은밀한 ‘악의 충동’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탈출구를 발견해낸다. 자신의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을 ‘각자 다른 육체’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에 빠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한 본성을 상처 입히지 않은 채로, 더 나아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전혀 손상당하지 않은 채로, ‘악의 충동’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아 ‘하이드’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의 기상천외한 화학 실험은 그의 집안에서 은밀히 이루어지고 하인들은 그가 필요로 하는 약물을 사다주지만 주인의 ‘변신’을 좀처럼 눈치채지 못한다. 지킬-하이드는 자신의 범행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한편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던 화가 바질은 오랜 친구 헨리가 도리언 그레이에게 관심을 갖자 긴장한다. 자신이 남몰래 동경하고 숭배하는 대상인 청년 도리언 그레이가 헨리에게 매혹당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질은 도리언 그레이를 ‘석고상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델’로서 대하고, 헨리 경은 ‘석고상’이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 꿈틀거리는 도리언 그레이의 눈부신 젊음을 간파해낸다.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그림만 그리는 화가 바질. 그의 집요한 침묵을 견디느라 지칠 대로 지친 도리언 그레이는 헨리 경의 화려한 입담과 우아한 매너에 마음을 빼앗긴다. 마침내 초상화가 완성되자 도리언 그레이는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처럼 감탄한다. 내가 저토록 아름다운 존재였다니. 이 아름다움은 몇 년 후면 흔적 없이 스러질 것이고, 나는 평생 동안 되찾을 수 없는 나 자신의 젊음을 질투하겠지.
자신의 아름다움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레이는 바질의 완벽한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위험한 아름다움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 그레이의 매력을 한껏 숭배하는 헨리의 달콤한 속삭임이 그의 영혼 속에 잠들어 있던 욕망을 깨웠다. 자네의 아름다움은 분명 사라질 거야. 이 아름다움의 열기가 식기 전에, 자네는 자신의 한 번뿐인 젊음을 마음껏 발산해야 한다고.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유혹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마음속에서 남몰래 억누르는 모든 충동이 결국 우리를 오염시킨다고.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를 본 순간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처음 알아본 사람처럼, 지금까지의 삶은 모두 틀렸으며 이제부터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난 점차 늙고 끔찍하고 흉해지겠지. (…) 내가 언제나 젊고 이 그림이 대신 나이를 먹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바칠텐데! 그럼, 그것을 위해서라면 세상에 내가 바치지 못할 게 뭐가 있을까! 내 영혼이라도 기꺼이 내어줄 거야! (…) 난 소멸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모든 걸 질투해요. 당신이 나를 보고 그린 이 초상화까지 질투한다고요. 어째서 내가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속에 담겨 있죠? 매 순간이 지날 때마다 내가 빼앗기는 그 어떤 것이 저 그림 속에는 담겨 있어요. 아, 만약 그 반대일 수만 있다면! 만약 저 그림이 변하고, 내가 항상 지금과 같을 수만 있다면!
-오스카 와일드, 김진석 옮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78~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