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vs 『오만과 편견』 ⑦
7. 먼저,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내 제인 오스틴처럼 노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시간의 문을 통과해 똑똑하게 들려온다.
-버지니아 울프
드라마나 영화에서 ‘너를 사랑한다’는 상대방의 고백에 ‘정말 고맙다, 하지만…’으로 시작되는 거절의 멘트로 반응하는 주인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들은 마치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담스러운 선물을 정중히 거절하듯 자기 앞에 다가온 사랑을 예절 바르게(?) 거부한다. 사랑해줘서 고맙다니! ‘사랑하진 않지만, 친구로 남아 있어줘’라는 부탁만큼이나 잔인한 거절이 아닌가. 그러나 ‘사랑한다’는 고백을 향한 ‘감사’의 반응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치명적인 본질을 꿰뚫는 측면이 있다. 누가 뭐래도 사랑은 타인을 향한 최상의 예찬이며, 누군가의 존재를 속속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형식이니까. 그것은 단지 누군가의 ‘장점’이나 ‘재능’에 한정된 예찬이 아니라, 너의 모든 결점마저 대책 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예찬이니 말이다.
제인에 대한 로체스터의 사랑, 엘리자베스에 대한 다아시의 사랑 또한 그녀들을 향한 최고의 예찬을 담고 있다. 당대인이 선호하는 ‘신붓감’의 일반적 기준으로서는 결코 높은 평점을 기대할 수 없는 그녀들을, 로체스터와 다아시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기준’으로 온힘을 다해 예찬한다. 오직 그녀에게만 어울리는, 이 세상 단 한 사람을 향한 은밀한 예찬은 얼어붙은 제인과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조금씩 해동시킨다. ‘사랑’과 ‘결혼’에 냉소적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란 제인과 엘리자베스는 자신들을 ‘적절한 신붓감’으로 교정(?)하려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 로체스터와 다아시, 있는 그대로의 그녀들의 모습에서 더없이 매력을 느끼는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인다.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아름답기 이를 데 없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험난하다. 사랑은 한 존재를 향한 매혹과 숭배에서 시작되지만, 사랑의 현실은 자신을 향한 최고의 예찬을 수용하는 우아한 형식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해체하는 뼈아픈 고통을 대가로 하는 모험이기 때문이다.
제가 무슨 자동인형인 줄 아세요? 감정도 없는 기계로 아세요? 그리고 입에 문 빵조각을 잡아채이고 컵에 담긴 저의 생명수가 엎질러지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복이 있어 조금만 예쁘고 조금만 부유하게 태어났다면 저는 제가 지금 당신 곁을 떠나기가 괴로운 만큼, 당신이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저는 지금 관습이나 인습을 매개로 해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에요. 제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두 영혼이 다 무덤 속을 지나 하느님 발밑에 서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자격으로 말이에요. 사실상 우리는 현재도 동등하지만 말이에요!
- 샬롯 브론테, 유종호 옮김, 『제인 에어』 2권, 민음사, 2004, 31~32쪽
제인과 엘리자베스뿐 아니라 로체스터와 다아시도 ‘사랑’이라는 영혼의 모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정체성의 갑옷을 벗어던져야 했다. 다아시는 자신을 과잉보호해온 ‘너무 화려한 조건들’의 보호막을, 로체스터는 스스로 꽁꽁 숨기고 있는 ‘너무 치명적인 비밀들’을, 고통스럽게 벗어던져야 했다. 다아시는 자신의 뿌리 깊은 오만을 폭로하는 제인의 무차별 인신공격을 통해 자신이 미처 되돌아보지 못한 타인의 고통을 깨닫게 된다. 다아시는 제인의 오해를 풀기 위해 절절한 진심이 우러나오는 장문의 편지를 쓰고, 그의 고고한 스타일을 무너뜨리는 위험을 감수하며 제인을 돕기 위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한편 로체스터는 한때 방황과 타락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정화하기 위한 ‘속죄의 도구’로 제인의 순수를 이용하려 했고, 그런 마음으로는 제인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로체스터는 일단 제인 에어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그 다음에 자신의 ‘죄’(다락방에 ‘미친 아내’ 버사 베이슨을 숨겨두고 있었다는 사실)를 고백하려 하지만 그 방식 또한 제인을 얻기 위한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온몸으로 진실에 부딪히는 것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제인은 떠나버리고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고통스런 이별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참혹한 기다림을 통해 두 사람은 비로소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지기 전, 사람들은 한 번도 자신의 날개를 제대로 펼쳐 본 적이 없는 새들처럼 ‘자신의 전부’를 알 기회가 없다. 막상 사랑에 빠지면 ‘숨을 곳’이 없어진다. 어떤 에티켓과 매너로 치장을 해도, 아무리 냉철한 척 포커페이스를 연출하려 해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결국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다. 그 숨길 수 없음이 우리를 끝내 해방시킨다. 오만과 편견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은, 사랑에 빠지기 전에나 누릴 수 있는 감정의 사치일지도 모른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인정사정 볼 것이 없다. 자존심을 챙길 여유도, 자격지심을 돌볼 계제도 없다. 오만을 가꾸고 편견을 관리할 시간도 당연히 없다. 사랑은 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내 날개의 빛깔을 내 스스로 발견하게 만드는, 천변만화한 빛깔로 매순간 반짝이는 내 안의 날개를 세상 밖으로 한껏 펼치게 만드는, 오직 ‘나와 너’ 사이에서만 유효한 해방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다아시의 여동생 조지아나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엘리자베스였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자기 오빠에게 아슬아슬할 만큼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겁할 만큼 놀랐지만 말이지요. 조지아나에게 오빠는 언제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고 실제로 오빠를 향한 애정이 그와 같은 존경심에 압도될 정도였는데, 이제는 오빠가 대놓고 놀릴 수도 있는 존재로 보였습니다. 조지아나의 머릿속에 그전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충분히 스스럼없는 태도(열 살 많은 오빠가 동생에게 늘 허락하는 것은 아닌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 제인 오스틴, 김정아 옮김, 『오만과 편견』,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538~5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