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vs 『오만과 편견』 ⑥
6. 질투 혹은 오해: 사랑의 끔찍한 기회비용
내 눈길은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로 쏠렸다. 나 자신도 내 눈꺼풀을 어쩔 수가 없었다.
눈을 내리뜨려고 해도 눈꺼풀이 위를 향하는 것이었다. 눈동자가 그의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기뻤다. 고통이라고 하는
강철 칼날이 붙은 순금의 값비싸고 강렬한 기쁨이었다.
자기가 기어서 당도한 샘물에 독이 섞여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허리를 구부리고
물을 마시는,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맛보는 것 같은 기쁨이었다.
-샬롯 브론테, 유종호 옮김, 『제인 에어』, 민음사, 2010, 317쪽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과 동시에, 이 사랑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예감이 시작될 때. 시작부터 ‘안 된다’고 느끼는 사랑의 고통은 끔찍하지만, 더 큰 고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결코 멈출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제인 에어는 엄청난 신분 차이로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로체스터를 바라보는 순간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기가 기어서 당도한 샘물에 독이 섞여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허리를 구부리고 물을 마시는,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맛보는 것 같은 기쁨”이라고. 로체스터 또한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온 여자들과는 너무도 다른 제인에게 이끌리지만, 예전부터 염두에 두어 왔던‘비슷한 신분’의 블랑슈 양과의 혼인을 생각하고 있다. 로체스터는 ‘귀족 치고는’ 굉장히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만 열여덟 살 풋내기 가정교사에 대한 ‘알 수 없는 설렘’을 ‘사랑’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인을 선택한다는 것은 로체스터의 인생 전체를 갈아엎는 엄청난 ‘기회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제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격렬한 질투를 느낀다. 아름다운 외모로 좌중의 시선을 압도하는 블랑슈는 ‘제인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무엇’을 강렬하게 환기시키고, 그 가질 수 없는 대상은 바로 로체스터 씨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한심하게 처신했어! 통찰력 있다고 자부하던 내가! 재주 있다고 뻐기던 내가! (……) 남들을 쓸데없이 어쭙잖게 의심하며 허영심을 채웠는데! 이게 무슨 창피람! 하지만 창피 당해도 싸지! 그게 사랑 때문이었다고 한들 이보다 더 지독하게 눈이 멀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허영심 때문에 바보짓을 했어. 맨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나를 치켜세워 기분 좋게 해주었고, 또 한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 상처를 주었지. 그래서 이 두 사람이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편파와 무지를 반기며 이성을 몰아내버렸어.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어.
-제인 오스틴, 김정아 옮김, 『오만과 편견』,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312~313쪽
한편, 다아시를 줄기차게, 지치지도 않고 미워하고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갑작스런’ 청혼으로 인해 패닉 상태에 빠진다. 위컴 씨의 다아시에 대한 비난을 곧이곧대로 믿고, 언니 제인과 빙리 씨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까지 다아시에게 돌리며, 다아시에 대한 반감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있을 때, 공교롭게도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고, ‘여자의 마음’을 얻는 노하우도 없는 순진한 다아시는 자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불합리한’ 선택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엘리자베스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는 자신을 대책 없이 떠받들거나 무턱대고 어려워하는 수많은 여성들과 달리, 유독 자기에게만 무시무시하게 적대적인 엘리자베스에게 아이러니컬한 호감을 느낀다. 자신의 대단한 지위나 재산이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두고 대뜸 이판사판 맞장을 뜨는 엘리자베스의 용기가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가혹한 거절. 그녀의 거절로 인해 다아시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거부당했다’는 고통을 겪지만, 그 고통은 그를 한층 성숙하게 한다. 그는 온 마음을 담아 엘리자베스의 오해를 풀 수 있는 장문의 편지를 쓰고, 엘리자베스는 그 절절한 편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며 자신의 심각한 오해를 풀게 된다. 엘리자베스의 유산을 노리고 접근한 위컴의 악의를 몰라본 것,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모든 책임을 다아시에게 돌린 실수,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편견’ 때문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 가혹한 편견의 배후에는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까봐 두려운 한 소녀의 상처 받기 쉬운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호감’을 보였다면 『오만과 편견』이라는 세기의 로맨스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은 어처구니없게도, 그토록 비이성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질까봐 두려운, 평생 ‘제 잘난 맛’에 살아온 선남선녀들의 유쾌한 ‘오해’가 빚어낸 로맨스였던 것이다.
그가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그의 면전에 몇 시간씩 있는데도 내게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그에 대한 사랑을 돌릴 수는 없었다. 또는 어쩌다 지나갈 때 옷자락이라도 내 몸에 스칠까 저어하였고 또 어쩌다 그 까맣고 교만스런 눈길이 내 몸에 닿으면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금시 외면을 하고 마는 귀부인에게 그의 온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가 머지않아 이 귀부인과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휘어잡았다는 의기양양한 자신만만함을 날마다 그녀에게서 느끼게 되었다고 해서, 시종 그에게서 구애의 태도를 목격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미 그에 대한 사랑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많았지만 사랑을 식히고 사랑을 몰아낼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샬롯 브론테, 유종호 옮김, 『제인 에어』, 민음사, 2010, 3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