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vs 『오만과 편견』 ⑤
5. ‘존재’에서 ‘관계’로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무례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 아닌가요?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반감’을 키워가고 있는 동안,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호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이루어질 사랑’의 시선으로 보자면 엘리자베스의 ‘반감’은 천하무적의 자존심으로 무장한 여성이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가지는 본능적인 경계심이며, 사랑하지 않으려 할수록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는 사랑의 전형적 패턴이 아닐까. 엘리자베스는 무도회에서 다아시와는 어떤 종류의 대화도 나누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다짐하지만 막상 다아시가 춤을 신청하자 ‘엉겁결에’,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스’를 선언한다.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이 “그 사람에게 호감이 생길지도 모르잖아”라고 말하자 엘리자베스는 파르르 떤다. “그건 안 돼! 세상에 그렇게 불행한 일도 없을 거야! 미워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한테 호감이 생기면 어떡해! 그런 악담은 하지 말아줘.” 그녀의 ‘지나치게 강력한’ 부정은 독자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애써 부정할수록 더 커지는, 숨길 수 없는 사랑의 혐의가 짙게 배어나기에.
사람들은 혹시나 자신의 마음을 들킬세라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연출해 보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만큼 숨기기 힘든 비밀도 없다. 내가 저 사람을 꿰뚫어보는 것만큼 저 사람도 나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느낌. 그 발가벗은 느낌이 결코 싫지는 않지만 미친 듯이 심장은 뛰어대고, 이 가눌 수 없는 설렘은 이상하리만치 달콤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로체스터의 수양딸 아델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된 제인이 로체스터를 대하는 마음 또한 그렇다. 세상에 태어나 마음껏 웃어본 기억조차 없는, 누가 봐도 무뚝뚝하고 무표정해보이던 제인 에어. 아버지뻘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우락부락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남자’로 다가온다.
로체스터는 제인과 안면을 트자마자 저쪽에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내 쪽에서 모든 걸 다 말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열여덟 살 소녀 제인 에어에게 자신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털어놓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는 로체스터. 왠지 그녀가 자신의 ‘고해’를 다 받아줄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 로체스터는 제인 에어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동시에 제인 에어 스스로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제인을,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억누르며 살아와야 했던 성장환경 때문에 미처 발현되지 못한 가장 그녀다운 모습을 예리하게 탐지해낸다.
당신은 “당신은 웃는 법이 없지요? 뭐, 대답을 할 것까지는 없어. 내가 보기에 당신은 좀처럼 잘 웃을 것 같지 않군. (…) 내가 선천적으로 고약한 성미가 아닌 것처럼 당신도 선천적으로 그렇게 뚱하게 태어난 것은 아닐 거요. 로우드에서의 속박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거요.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표정을 누르고 목소리를 죽이고 손발의 동작을 묶고 있는 거요. 그래서 남자 앞에서는 형제든 아버지든 주인이든, 두려워서 신나게 웃지도 못하고 마음 놓고 얘기도 못하고 재빠른 동작을 취하지도 못하는 거요. 그러나 머지않아 내게도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을 거요. 마치 내가 당신에게 판에 박힌 격식을 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오. (…) 내게는 가끔가다 새장의 촘촘한 칸막이 사이로 밖을 넘겨다보는 기묘한 새의 눈길이 보인단 말이오. 생기발랄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굳센 의지를 가지고 있는 포로가 갇혀 있는 것이란 말이오. 자유의 몸이 되기만 하면 하늘 높이 날아오를 거요.
-샬롯 브론테, 유종호 옮김, 『제인에어』, 민음사, 2004, 252~253쪽.
제인 에어를 바라보며 로체스터는 말한다. 당신의 영혼은 잠자고 있다고. 당신의 영혼을 일깨울 커다란 충격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제인 에어는 예감한다. 내 영혼이 정말 잠들어 있었다면, 그 영혼을 깨우고도 남을 엄청난 충격이 바로 지금 시작되고 있음을. 제인 에어는 언제 어떻게 또 다시 처참하게 버려질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존재’만을 돌보기도 벅찬 삶을 견뎌왔다. 하지만 로체스터를 알아가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관계’의 그물망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던지는 법을 배운다. ‘나 하나’라는 ‘존재’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던 그녀는 ‘관계’의 프리즘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처음으로 그동안 숨겨왔던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로체스터가 의문의 화재사건으로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순간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의 침대에 불이 붙기 시작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용기를 발휘해 그를 구해낸다. 제인 에어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존재’에 ‘관계’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햇살을 비춰준 로체스터를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제인과 엘리자베스, 그녀들은 이제 자신들의 ‘존재’에 지나치게 집착하던 과도기를 지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바꾸는 영혼의 통과의례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내밀었다. 처음엔 내 손을 한 손으로 잡더니 나중에는 두 손으로 잡는 것이었다.
“당신은 내 생명을 구해 주었소. (…) 당신 아닌 딴사람이 이러한 은혜의 채권자로 나타났다면 나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당신에게서 받은 은혜가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 제인.”
(…) 그는 여전히 내 손목을 쥐고 있어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나는 편법을 생각해내었다. “페어팩스 부인이 일어난 것 같아요.” 하고 나는 말하였다. “그럼, 가봐요.” 그가 내 손목을 풀어주어 나는 방을 나섰다.
나는 침대로 돌아갔으나 다시 잘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동이 틀 무렵까지 나는 기쁨의 파도 밑으로 걱정거리의 물결이 요동치는, 흔쾌하면서도 평온하지 못한 바다 위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때때로 거센 파도 저 너머로 뷸라의 언덕처럼 아름다운 육지가 보이는 듯하였다. 그리고 희망으로 잠이 깨인 상쾌한 바람이 이따금씩 내 영혼을 그 목적지로 의기양양하게 실어다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샬롯 브론테, 유종호 옮김, 『제인 에어』, 민음사, 2004, 276~2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