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vs 『오만과 편견』 ④
4. 당신의 결점은 무엇입니까
교만할 만하니까 교만한 거 아니니. 다아시는 멋있는 청년인데다가 집안 좋지, 재산 많지, 없는 게
없는데, 자기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이런 표현 써도 될지 모르지만,
그 남자에게는 교만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어.
-제인 오스틴, 김정아 옮김, 『오만과 편견』,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65쪽.
누군가에 대한 ‘뒷담화’만큼 낯선 사람을 빨리 친하게 만드는 촉매가 있을까. 공통의 ‘적(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쉽게 ‘같은 편’이라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아, 맞아요, 그 사람 정말 이상하죠? 그 사람이 당신에게도 그랬나요? 이런 흥미로운 뒷담화는 ‘적’에 대한 대화이긴 하지만 실은 대화하고 있는 우리, 당사자들의 인생과 성격을 증언하는 대화이기도 하다. 우연히 마주친 다아시와 위컴 사이에 오가는 험악한 분위기를 눈치 챈 엘리자베스는 위컴에 대해 급속도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위컴은 어떤 사람이기에 저토록 침착한 다아시를 한방에 무너뜨릴 수 있는 걸까. 이런 호기심은 위컴의 잘생긴 외모와 시너지를 일으켜 ‘호감’으로 바뀌고, 위컴의 현란한 화술은 그녀의 호감을 ‘신뢰’로 바꾸어버린다. 위컴은 멋진 외모와 요란한 화술로 멀쩡한 다아시를 얼간이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에 대한 비호감을 나쁜 편견으로 고착시켜 버린다. 그래, 다아시는 내 예상대로 ‘불쾌한 인간’이었던 거야.
A와 B가 같은 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두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된 듯한 은밀한 환상을 공유한다. 다아시에 대한 ‘뒷담화’로 ‘편견의 동맹’을 맺은 엘리자베스와 위컴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녀가 이렇듯 한 남자에 대한 비호감을 제3의 남자에 대한 호감으로 바꿔가는 동안, 다아시는 그녀의 잘못된 편견에 대해 해명할 어떠한 기회도 갖지 못한다. 위컴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호감은 정확히 다아시에 대한 반감에 비례한다. 다아시를 싫어하기 때문에 ‘다아시의 적’임에 분명한 위컴에 대해 처음부터 호감을 느끼는 것이다. 평소에 굉장히 논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엘리자베스는 유독 다아시와 위컴에 대해서만은 냉철한 판단력을 잃어버린다. 다아시가 자신과의 춤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다아시의 오만해 ‘보이는’ 행동에 진절머리가 난 엘리자베스. 그녀는 위컴의 수려한 외모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두 사람이 서로 철천지원수처럼 보인다는 사실로 위컴과 다아시의 ‘인격’에 대한 스캐닝을 끝내 버린다. 조금은 얄미울 정도로 똑똑하고 당당하던 그녀, 엘리자베스가 처음으로 그녀의 ‘결점’을 독자에게 들켜버리는 순간이다. 이러한 그녀의 편견이 위험하다기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엘리자베스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런 ‘편견’은 우리가 살면서 곧잘 저지르는 ‘감각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결점’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고, 다아시는 자신의 결점을 매력적인 여자에게 폭로 당하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아직 깨닫지 못한다. 다아시의 결점이야말로 그녀가 나중에 다아시를 사랑하면서 느끼게 될 가장 커다란 매력의 진원지라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결점’을 폭로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아시라는 남자에게 이상하리만치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아시씨는 결점이 전혀 없는 분이라는 결과가 나왔어요. 본인도 대놓고 인정하시네요.”
“아닙니다. 저는 제가 결점이 없다고 말한 적 없어요. 저도 결점이 꽤 많지만 머리 쪽이 결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입니다. (…) 누가 어리석거나 부도덕하게 굴면 좀처럼 잊지 못합니다. 누군가로 인해 기분이 상했던 일도 잘 잊지 못하고요. 마음의 앙금을 털어버리려고 해도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저 같은 경우를 두고 화가 안 풀리는 성격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저한테 한 번 잘못 보이면, 영원히 잘못 보이는 거죠.” 다아시가 말했습니다.
“드디어 결점을 찾았네요!” 엘리자베스가 소리쳤습니다. “화가 안 풀리는 성격이라면, 그건 분명 결함이지요. 하지만 결함 하나는 아주 잘 고르셨네요. 어떻게 비웃어야할지 도통 모르겠거든요. 저한테 비웃음 당하실 염려는 없으시겠어요.”
-제인 오스틴, 김정아 옮김, 『오만과 편견』,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13쪽.
우리는 자주 망각한다. 누군가의 ‘결점’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과 전에 없이 성큼 가까워져 있음을. 『제인 에어』에서 헬렌 번즈가 자신의 결점을 늘어놓는 동안 제인은 ‘동의할 수 없다’고 느끼며, 헬렌 번즈에게는 누구도 가지지 못한 빛이 있음을 알아본다. 제인은 헬렌 번즈가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빛으로 사물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것, 제인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헬렌은 ‘자기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본다. 결점은 우리를 절망스럽게 한다. 그러나 결점은 우리를 ‘통(通)’하게 만든다. 결점의 프리즘으로 비친 상대방은 깔끔하게 정제되고 화려하게 장식된 상대방의 모습보다 훨씬 정직한 감각의 창(窓)으로 그를 바라보게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수많은 결점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장애물을 만든다. 하지만 그 결점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 결점만이 가진 이상야릇한 매력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나는 이 인종(忍從)의 교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자기에게 벌을 과한 위인에게 표시하는 그녀의 관용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공명이 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헬렌 번스는 내게는 보이지 않는 빛으로 사물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너는 자신에게 결점이 있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결점이야? 내가 보기에 넌 아주 훌륭해 보이는데.”
-샬롯 브론테, 유종호 옮김, 『제인 에어』, 민음사, 2004,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