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vs 『제인 에어』①
1. 행복 미루기의 달인들, 우리가 바로 지금
행복해지는 법은?
제인 에어 vs 엘리자베스 베넷
“저의 오만불손함에 반했나요?”
“당신 덕분에 오만했던 제 콧대가 제대로 꺾였습니다.”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중에서
사춘기 시절, 사랑의 경험은 없으나 사랑에 대한 온갖 무지갯빛 정의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나는 사랑을 동경하되 사랑을 두려워했다. 사랑은 오직 문학작품 속에서만 즐길 수 있는 가상의 롤플레잉 게임이었다. 열일곱 고교시절에는 결코 알지 못했다. 사랑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곧 존재에 대한 불안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그 시절 나는 내 존재의 불안이 사랑을 향한 접근 자체를 가로막는 장애물임을 몰랐다. 말하자면 사랑에 대한 공포는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였다. 좁디좁은 자아의 동굴에서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을 두려워하고만 있었던 내게, 난생 처음 단지 ‘독서의 창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직접 쏟아지는 햇살처럼 다가왔던 소설이 바로 『제인 에어』였다. 그토록 처절하고 아름다운, 한 여자의 투쟁을 통해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도 같다. 말하자면 나는 『제인 에어』를 통해 어떤 이에게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 인생을 찾는 일과 정확히 같은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웠다.
『오만과 편견』은 『제인 에어』에 비하면 너무 늦게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행복이 성실한 삶이라는 저축에 대한 ‘이자’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삶의 행복이라는 예금을 바로 지금 찾아 먹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비극보다 희극이 훨씬 이해하기 어려웠다. 비극을 즐긴 만큼 희극을 즐길 줄 알았다면 내 인생은 훨씬 단순하고 행복했을 텐데.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희극이야말로 비극보다 본질적으로 어려운 장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극을 자아내는 열정은 독자 개개인의 고생담만으로도 얼추 그 비장미를 ‘흉내’낼 수 있지만, 희극은 비극조차 온전히 자신의 일부로 껴안은 자의 ‘여유’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오만과 편견』은 ‘아직 행복해지긴 일러’, ‘아, 나는 행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간임에 분명해’, ‘행복이 눈앞에 다가와도 행복은 나를 피해 달아나지 않을까’ 하고, 행복 자체를 의심하고 행복을 끊임없이 먼 훗날로 미루는 현대인들에게 바로 지금, 행복을 추구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음을 일깨우는 유쾌한 희극이다. 나는 천성적으로 눈물을 이해하는 것보다 웃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오만과 편견>은 내게 너무나 늦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그래서 더 소중한 고전의 카탈로그에 자리 잡았다.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를 향해 우리는 로맨틱 코미디의 모든 까칠남, 초식남의 목소리를 투영한다. 엘리자베스를 향해 우리는 로맨틱 코미디의 모든 건어물녀, 결못녀들의 다성성을 대입하며 은밀히 환호한다. 제인 에어는 평강 공주의 먼 친척뻘이면서 동시에 우울증에 걸린 빨강머리앤처럼 느껴졌다. 로체스터는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이미 죽은 아내를 비밀의 방에 숨겨두었다는 점에서 ‘푸른 수염’의 후예이자 나쁜 남자의 전형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다. 이들은 남녀간의 ‘진정한 사랑’의 가치가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던 시절, 감정의 갑옷을 둘째가라면 서럽게 꼭꼭 껴입었던 포커페이스의 달인들이었다. 하지만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게 사랑의 심연으로 돌진하기 마련이다. 오만한 다아시와 편견에 사로잡힌 엘리자베스, 자폐증 진단 일보 직전의 침울한 소녀 제인 에어와 자신의 두려움이 클수록 남을 두렵게 만드는 냉혈한 로체스터. 그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당신은 공손한 언행에 싫증이 났어요. 당신을 떠받들어 주고 귀찮게 시중들어 주는 사람들이 지겨워졌지요. 당신 눈에 들겠다는 일념으로 한 마디, 눈길 한 번, 생각 하나까지 신경 쓰는 여자들을 당신은 오히려 싫어했답니다. 제가 당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제가 그런 여자들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어요.
- 제인 오스틴, 김정아 옮김, 『오만과 편견』, 펭귄 클래식, 528~5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