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vs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지막회
6. 달콤한 환상이 끝난 후에도 사랑이 가능할까
모짜르트, 바하, 비틀즈...그리고 당신을 사랑해요.
- 영화 <러브 스토리> 중에서
잊지 말아요. 나 또한 그저 한 남자 앞에 서서, 부디 나를 사랑해달라고 부탁하는,
한 사람의 여자일 뿐이에요.
- 영화 <노팅힐> 중에서
에드워드: 탑에 갇힌 공주를 왕자가 구해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비비안: 그 다음엔 공주가 왕자를 구해주죠.
- 영화 <프리티 우먼> 중에서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설렘이, 그 사람을 만날 때의 떨림이, 더 오래오래 지속되는 방법은 없을까. 사랑의 생물학적 유효기간이 3년을 넘지 못한다는 속설에 실망하는 사람들, ‘결혼하더니 남편이 달라졌다’고 하소연하는 아내들, ‘첫사랑의 전화가 오면 지금이라도 달려가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남편들의 마음속에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꿈이 서려 있다. 이 꿈에는 사랑은 자고로 환상적이고 낭만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못지않게 가혹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결혼한 사람들도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맥 빠지는 현실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정말 사랑의 환상은 그렇게도 쉽게 증발해버리는 것일까. 낭만적 환상이 끝나버리면 사랑도 함께 덧없이 증발해버리는 것일까.
환상이 끝난 후의 사랑, 낭만이 사라진 후의 사랑. 더 이상 상대방이 ‘여신’이나 ‘영웅’처럼 보이지 않아도, 그 사람을 평범한 인간으로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콩깍지’가 완전히 벗겨지고 나서 속속 발견되는 상대방의 단점과 결핍마저도 그 사람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들을, 연애가 우정으로 화학 변화하려는 듯한 사랑의 위기(?)를 견디는 법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환상이 끝나고 난 후의 사랑’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사랑이 아닐까.
삶을 파괴하는 열정이 아니라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존재의 평화를 추구하는 사랑. 그런 사랑의 기회가 트리스탄에게도 있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는 흥미롭게도 두 명의 이졸데가 등장하는데, 트리스탄에게 자신의 모든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열정적 사랑의 대상이 ‘아름다운 이졸데’라면 트리스탄이 그녀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여인은 ‘흰 손의 이졸데’였다. ‘아름다운 이졸데’의 가장 큰 장점이 ‘아름다움’ 그 자체라면 ‘흰 손의 이졸데’의 최고 장점은 ‘살림’의 능력이었다.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고 재울 수 있는 총체적 능력, 짜릿한 희열의 순간이 아니라 평화로운 일상을 이끌어가는 능력. 그것이 흰 손의 이졸데가 가진 힘이었다. 트리스탄은 그녀와 결혼까지 하고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이졸데’를 향한, 아니 ‘완전한 사랑’의 모범답안에 대한 낭만적 판타지의 안개가 걷히지 않았던 것이다. 흰 손의 이졸데와 형식적인 결혼식만 올린 후 여전히 첫날밤조차 치르지 않았던 트리스탄. 그를 사랑했기에 남편의 무관심이 언젠가는 사랑으로 바뀌기를 기다렸던 흰 손의 이졸데에게 트리스탄이 남긴 것은 배신의 상처뿐이었다. 흰 손의 이졸데는 아름다운 이졸데의 드라마틱한 사랑을 빛내주기 위한 엑스트라가 아니라, 아름다운 이졸데가 미처 살지 못한 ‘삶’, 죽음조차 불사하는 파괴적 열정이 아니라 삶을 위해 때로는 열정의 불씨를 잠재울 수 있는 ‘일상’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상징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트리스탄과 이졸데 커플 모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는’ 결말을 택한다. 그들의 죽음은 지상에서 못 이룬 사랑을 천상에서 이루려는 의지의 표현이겠지만 이 죽음은 ‘예술’로서는 아름다운 소재이되 ‘일상’에서는 롤 모델이 될 수 없다.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딘가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거야’라고 믿는 현대인의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 그 환상의 뿌리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완전한 사랑을 향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완전한 사랑을 향한 갈구가 현실의 사랑이 지닌 가치를 떨어뜨릴 때가 있다. 언젠가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 여기’의 사랑을 가꾸는 것이 바로 그 진정한 사랑으로 향해 가는 길임을 망각하곤 한다. 사랑은 ‘완전한 너’를 향한 닿을 수 없는 갈망이 아니라, ‘불완전한 너와 나’를 향한 무한한 존중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나’에게 있는 것도 ‘너’에게 있는 것도 아니라, 너와 나의 ‘사이’에 있는 것이니까. 그 ‘사이’의 공간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것은 달달한 환상의 숨바꼭질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운명까지 끌어안는 ‘우리’의 노력이니까.
찜통 같은 더위에도 혼자 추워 죽겠다는 너를, 샌드위치 하나 주문하는 데도 한 시간이 걸리는 너를, 사랑해. 날 바보 취급하며 쳐다볼 때 콧가에 작은 주름이 생기는 네 모습을, 너와 헤어져서 돌아올 때 내 옷에 묻은 네 향수 냄새를, 사랑해. 내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너이기에, 사랑해.
-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중에서
우리는 그렇게 오래 만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키미가 그러는데 누군가를 사랑하면 꼭 사랑한다고 말을 하래. 그 순간 크게 소리치라고...
아니면 그 순간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니까...
-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