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vs 트리스탄과 이졸데 ④
4. 부디, 더 많은 슬픔을, 더 많은 고통을…
영혼은 자아라는 갑옷에 뚫려 있는 커다란 틈새를 통해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든다.
로맨틱 러브가 바로 그 틈새이다.
- 로버트 존슨, 고혜경 옮김, <WE: 로맨틱 러브의 융 심리학적 이해>, 동연, 301쪽.
두 연인은 커다란 바위틈에 칩거하며 추위를 피했다. 또한 추위에 얼어 단단해진
땅바닥에서는 얼음덩이들이 솟아올라, 마른풀을 깔아 만든 그들의 잠자리를 뚫고
올라왔다. 그러나 사랑의 힘 덕분으로, 두 사람은 고초를 느끼지 못하였다.
-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에서
아픔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아픔을 추구하는 것. 고통이 마치 사랑의 의무이기라도 한 듯 고통을 적극적으로 견디는 것. 그 또한 낭만적 사랑에 빠진 이들의 주된 특기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일종의 자발적 최면 상태에 빠져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과 마주치곤 한다. 평소에는 ‘유치하다, 촌스럽다, 멍청하다’라고 믿었던 모든 행동들을, 사랑에 빠졌을 때는 거리낌 없이, 오히려 더욱 큰 기쁨으로 해낼 수 있다. ‘사랑에 눈멀다’라는 표현은 바로 사랑 말고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혹은 파괴적인 맹목을 표현하는 만국공통어다.
어떤 고난도 견디게 하고, 어떤 누추한 공간도 환상의 궁전으로 만들어주는 사랑. 트리스탄과 로미오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세계의 견고한 장벽들을 사랑의 이름으로 뛰어넘는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 사이의 경계, 용서받을 수 있는 것과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의 경계. 그 모든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낭만적 사랑은 단지 육체적 결합을 위한 열정이 아니라 내 존재의 완성을 향한 열정이라는, 평소의 세속적인 열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열정을 촉발한다. 로미오와 트리스탄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의 사랑을 매도하고 금지하는 상황에 처하자 드디어 지금까지의 삶 전체를 뒤엎는 ‘결단’을 내린다. 바로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을 찾아 지금 여기의 모든 삶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트리스탄! 상상의 성이 어딘가에 있다고 들었어요. 이 성은 일 년에 두 번 사라지는데, 우리도 상상의 성처럼 사라져 하프가 연주되는 마법의 과수원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공기가 벽을 만들어 사방을 병풍처럼 가려주고, 나무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흙이 향기를 내뿜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지 않고도 온종일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살 수 있고 어떤 적대적인 힘도 그 공기의 벽은 뚫지 못하고…
-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에서
열정passion이란 단어는 본래 ‘고통을 받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열정과 고난은 같은 힘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열정에 집착할 때 우리는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고 고난조차 즐기며 고난이 스스로 원하는 궁극의 이상에 다다르는 길이라 믿기도 한다. 이 열정의 클라이맥스를 지나자 이졸데는 ‘사랑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트리스탄이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니 비로소 트리스탄이 자신을 위해 겪은 고초가 가슴 시리다. 그들이 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디는 이유는 언젠가는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꿈의 시간’이, ‘환상의 공간’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여기’가 아닌 ‘저곳’에는 분명 우리의 사랑이 굳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꿈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까. 사랑은 그런 꿈의 세계를 발명하거나 발견하는 실천이 아닐까.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이 두 커플은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고통의 극한에 다다라서야 로미오도 트리스탄도 깨닫게 된다. 지상에 그들의 사랑이 거처할 공간은 없다는 것을. 그녀가 가장 원하는 곳이 자신의 곁임을 알지만, 그녀가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위험한 곳도 바로 자신의 곁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나의 사랑이여, 한 번 가면 아무도 돌아올 수 없는 그 행복한 나라로, 우리 두 사람 함께 떠날 수 있으리다. 그곳에는 하얀 대리석 궁궐이 솟아 있고, 창문마다에는 촛불 하나씩이 밝혀져 있으며, 유랑 시인들이 각 창문에 한 사람씩 앉아서 영영 끝나지 않는 멜로디를 노래할 것이오. 그곳에는 햇빛이 비추지 아니하되 아무도 빛을 그리워하지 않으니, 그곳이 진정 살아 있는 이들의 행복한 나라라오.
-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