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vs <트리스탄과 이졸데> ③
3. '그대'를 넘어, '사랑'을 사랑하라
애석하도다! 사랑이란 스스로를 감출 수 없는 법이다. 물론, 브랑지엥의 세심한 주의 덕분에, 연인의 품에 안겨 있는 왕비의 모습이 아직은 그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건, 서로를 향한 갈망이 두 사람을 끊임없이 뒤흔들고 괴롭히며, 고이기 시작하는 포도주가 양조통 언저리로 넘쳐흐르듯, 두 사람의 모든 감각기관에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조제프 베디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지만지, 72~73쪽.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주변에는 일종의 투명한 ‘결계’가 형성된다. 이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기 안에 들이지 않겠다는,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결의. 이 사랑 외에는 아무것에도 시선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명한 인식의 장막. 그래서 그들은 정작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들의 표정을 알지 못한다. 마치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고, 밖에서만 안을 볼 수 있는 일방경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투명한 인식의 유리방에 스스로를 기꺼이 가둔다. 그리하여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야말로 주변 사람에게는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된다. 모두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자신들만 모르는 맹목, 그것이야말로 ‘사랑에 눈이 멀다’라는 표현의 핵심이다. 그들이 지금 빠져 있는 사랑은 ‘절대적’이기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들의 사랑을 뒤흔드는 ‘변수’가 될 수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학생들과 함께 읽어보면, 학생들이 가장 실망하는 대목이 바로 로미오의 ‘첫사랑’이다. 로미오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순수하고 완벽한 것인 줄 알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로미오가 정신을 잃고 환장하던 첫사랑은 줄리엣이 아니라 로잘린이라니. 줄리엣의 아름다운 외모에 정신이 팔려 로잘린을 한순간에 말끔히 ‘정리’해버리는 로미오의 변심은 ‘사랑의 절대적 이상형’을 찾는 독자들에게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로잘린에 대한 사랑과 줄리엣에 대한 사랑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로잘린을 짝사랑하던 로미오에게는 사랑의 ‘형식’이 중요했을 뿐, 정작 그 사랑에는 ‘내용’이 없었다. 로잘린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존중이 없었고, 로잘린이 로미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몰랐다. 무엇보다도 로미오는 로잘린보다는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을, 더 나아가 사랑이라는 관념 자체를 더 사랑했다. 실제 연인이 아니라 사랑의 ‘이상’에 빠져 당시 유행하던 사랑의 ‘형식’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페트라르카 풍으로 실연의 슬픔을 호소하며 ‘앓는 소리’를 일삼던 철부지 청년 로미오.
로미오에게 ‘내용 없는 형식’에 불과했던 로잘린에 대한 사랑은, 줄리엣을 만나면서 ‘내용〓형식’인 완벽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단지 사랑의 형식, 사랑의 이상을 갈구했던 로미오가 살아있는 실체로서의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잘린에 대한 사랑이 육체 없는 이상이었던 것에 비해 줄리엣에 대한 사랑은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구체적인 매혹이 된다. 그저 일방적인 이상과 독백에 지나지 않았던 로잘린에 대한 짝사랑에 비해, 로미오의 줄리엣에 대한 사랑은 ‘서로’를 향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고 가는 격렬한 시선 속에서 완성된다. 로미오를 향한 줄리엣의 애절한 독백을 듣는 순간 로미오는 자신의 마음이 곧 줄리엣의 마음과 정확히 똑같은 열정으로 타오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일방적인 연애시의 낭송이나 답장 없는 연애편지로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상호 교류하는 ‘언어’의 소통과 상대방의 ‘신체’를 향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줄리엣: 그대의 이름만이 나의 적일 뿐이에요. 몬터규가 아니라도 그대는 그대이죠. 몬터규가 뭔데요? 손도 발도 아니고 팔이나 얼굴이나 사람 몸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에요. 오, 다른 이름 가지세요! 이름이 별건가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건 다른 어떤 말로도 같은 향기 날 겁니다. 로미오도 마찬가지, 로미오라 안 불러도 호칭 없이 소유했던 그 귀중한 완벽성을 유지할 거예요. 로미오, 그 이름을 벗어요. 그대와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에 나를 다 가지세요.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2008, 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