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vs <트리스탄과 이졸데> ②
2. 프시케, 베아트리체, 줄리엣, 그리고 이졸데를 위하여
남성들에게 이런 여인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이 여인은 블랑시플레르이고, 아름다운 이졸데이고, 프시케이고,
베아트리체이고, 줄리엣이다. 신성을 지닌 원형적 여인인 것이다 .
- 로버트 존슨, 고혜경 옮김, 『We: 로맨틱 러브에 대한 융 심리학적 이해』,
동연 출판사, 87쪽.
에로스의 프시케, 단테의 베아트리체, 트리스탄의 이졸데, 로미오의 줄리엣, 그리고 베르테르의 로테…. 이 여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저들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인의 대명사다. 저들은 한 인간의 사랑을 넘어 집단적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각인된 기념비적 인물들이다. 그들은 인류의 신화적 이상형으로 자리 잡았기에 영원히 변치 않는 여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문학은 물론 음악과 미술 작품의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재소환된다.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사랑으로 인해 완전한 쾌락과 완전한 절망을 한 몸으로 느껴야 했던 커플의 전형이다.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함께 한 후 한날한시에 죽는 로맨틱 러브의 결정판이자 이후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적 도플갱어를 낳았던 원형적 캐릭터, 트리스탄과 이졸데.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두 남녀 모두가 당대인들이 추앙하는 이상적 남녀였다는 것이다. 트리스탄은 최고의 남성이었고, 이졸데 또한 최고의 여성이었다. 트리스탄은 최고의 무사, 최고의 사냥꾼, 최고의 하프 연주자로 묘사된다. 당대인의 눈에 비친 트리스탄은 ‘진정한 남성 영웅’이 갖추어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이상형이었다. 이졸데 또한 최고의 미모는 기본이고 모두가 포기한 트리스탄의 불치병을 고친 치료사였으며, 재예와 인품을 겸비한 왕비의 품격을 갖춘 여성이었다. 트리스탄은 숙부 마크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되어 한 나라의 왕이 되고도 남을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나 갓난아기 시절에 어머니까지 잃었던 트리스탄은 아버지처럼 자신을 보살펴 주고 인정해 준 마크왕의 약혼자였던 이졸데와 사랑의 묘약을 나누어 마시자마자 ‘불가능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서구의 문화사에서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 혹은 ‘열정적 사랑(love as passion)’은 단지 한 사람을 향한 일시적 충동이 아니라 ‘자아의 확장’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감정이었다. 기존에도 ‘사랑’은 있었지만 12세기를 전후로 하여 서구에 번지던 궁정식 사랑 혹은 낭만적 사랑의 열병은 ‘사랑’이라는 본성에 ‘문명의 형식’을 부여하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이었다. 죽음조차 불사하는 사랑,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의 공포자체를 사랑의 열정으로 승화시키는 불멸의 사랑은 12세기를 전후로 한 서구 문명의 발명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랑=연애=결혼’의 공식이 대중화된 것은 서구 사회에서도 근대 이후에나 가능했다. 중세인들, 특히 상류층 남성들은 ‘사랑 따로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는 라이프스타일에 어떤 부담감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들은 한 남자의 개인적 ‘용법’에 따라 얼마든지 다변화(!)될 수 있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가 형성되고 널리 사랑받기 시작한 12세기 이후부터, 로맨틱 러브는 인간의 단순한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숭고한 본성’으로 자리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로맨틱 러브는 ‘자아’에 머물러 있는 협소한 정신의 차원을 확장시켜 오직 사랑의 힘만으로도 위대한 업적이나 숭고한 예술 작품의 창조가 가능한 상태를 추구했다. 사랑은 한 인간의 ‘감정’의 영역을 넘어 한 인간의 ‘종교’이자 ‘예술’의 차원으로까지 비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도 아니고 우주도 아니고 세계도 아닌, 오로지 ‘한 여인’ 속에 자신이 이루어야할 모든 이상을 압축하는 힘. 그것이 바로 모든 다른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생명의 블랙홀, 로맨틱 러브의 문화적 힘이었다. 그것은 곧 신이나 계급이나 공동체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는, 온전한 ‘개인’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은 인간의 탄생. 사랑하는 사람만 내 곁에 있다면, 그 어떤 위대한 신의 위협도, 그 어떤 인간의 처벌도 두렵지 않다고 판단하는 순간, 트리스탄이 불가능한 사랑의 대상 이졸데를 끌어안고 “죽음이여, 올 테면 오라!”고 선언하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가련한 분들이시여, 멈추시오. 아직 그럴만한 힘이 있으시면 돌이키도록 하시오. 그러나, 아! 불가능한 일, 그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길, 이미 사랑의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두 분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장차 괴로움 없는 환희는 영영 맛보실 수 없게 되었소! 이즈, 나의 벗이여, 모후께서 손수 약초를 넣어 빚으신 포도주, 그 사랑의 미
“죽음이여, 올 테면 오라!”
저녁이 되어, 어둠의 장막이 내려지자, 배는 마크왕의 땅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는데, 영영 식지 않을 정염으로 결합된 두 사람은, 정염의 도가니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 조제프 베디에, <트리스탄과 이즈>, 이형식 옮김, 지만지, 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