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vs <호밀밭의 파수꾼> ④
싱클레어 vs 홀든 : 내 안의 상처를 투시하는 용기
정말로 자신의 운명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 그에게는 그때부터는 자기 비슷한 사람이 없어. 완전히 홀로 서 있지. 주위에는 오직 차가운 우주뿐이지.
-헤세, 『데미안』 중에서
어쨌든 난 제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수첩을 뒤지면서 그날 밤을 같이 보내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단 세 명밖에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부끄럽지만, 어린 시절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보다도 선생님의 ‘사랑’에만 목말라 하던 아이였다. 조금 못 가르치는(?) 선생님이어도 좋으니, 나는 선생님이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나를 콕 집어내어 한 번이라도 더 바라봐주기를 기대했다. 지식은 ‘자습’으로도 얻을 수 있었지만, 사랑은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무엇을 배우든 그 내용보다는 선생님의 ‘칭찬’이 중요했고, 칭찬 받지 못한 선생님의 과목은 성적이 늘 불안했다.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 나만을 좀 더 오래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심각한 공주병은 대학교에 가서 비로소 ‘치유(?)’되었다.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곧 세계 그 자체였던 학창시절을 지나자 나의 극심한 칭찬중독증은 저절로 해소되었다. 매일매일 새롭고 신기한 ‘세상’을 향한 맹렬한 짝사랑에 빠져 선생님의 사랑과 칭찬을 향한 목마름 자체를 깡그리 잊어버렸던 것이다.
정말 내가 멘토를 원하게 된 것은, 여전히 불완전한 사회인이 되고 나서였다. 그토록 많은 선생님들께 셀 수 없이 많은 지식을 전수받았지만, 그 모든 스승님들로부터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지식을 흡수했지만, 여전히 목말랐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스승에 대한 갈증은 더욱 절실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문학 작품을 접할 때 주인공들이 직접적인 사제관계를 맺지 않아도, 그들의 관계를 지속하는 동력을 ‘스승과 제자’ 사이의 친밀감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교과서나 자기계발서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그 무엇을, 반드시 ‘살아 있는 인간’에게서 배우고 싶어 한다.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느끼는 감동은 100권의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도 맞바꿀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느낀 감동과 충격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이 사람의 가르침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살아 있는 데미안의 존재가 곧 우주의 진리를 압축한 거대한 책처럼 다가오는 순간들. 데미안은 존재 자체가 놀라운, 그의 모든 행동이 하나하나 위대한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구루’였다. 그에게서 배우는 것은 세상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는 지혜였을 것이다. ‘아벨’의 무력한 순수를 닮은 연약한 모범생 싱클레어를 하루아침에 자신의 이마에서 ‘카인’의 표적을 느끼는 비범한 청년으로 만들어버린 이가 데미안이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두렵다. 그는 데미안을 사랑하는 만큼, 데미안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의 이마 위에 찍힌 카인의 표적을 느끼는 순간부터, 싱클레어는 이미 데미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샴쌍둥이가 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도대체 누구와 자신의 고민을 나눠야할지 몰라 괴로워하고 있었다면,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자신의 유일한 멘토가 누군지 분명히 알면서도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좀처럼 그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데미안에게 너무 큰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정신적 지배권 안에 속해있을 것 같은 예감. 데미안이 걸어가는 길은 불길하고 위험한 징조로 가득해 보이고, 데미안과 함께 하는 순간 ‘부모님이 약속하는 평화로운 세계’, 즉 시민적 안전과 질서의 세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다.
싱클레어는 깨닫는다. 데미안이야말로 크로머보다 더 강력한 적임을. 데미안야말로 아벨을 때려죽이고 흉물스러운 표적을 이마에 찍히고도 굴하지 않을 무서운 ‘카인’이었음을. 싱클레어는 아직 아벨이기도 하고 카인이기도 한 자신을 발견한다. 싱클레어는 대책 없는 순수와 수동성을 무기로 삼는 나약한 아벨이기도 하면서, 아버지가 창조한 세계를 증오하는, 언제 자신의 비범함을 발각당할지 몰라 자신의 표적을 숨기기에 바쁜 숨은 카인이기도 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자신이 다다라야 하는, 그러나 다다를 수 없는 미묘한 이상이자 섬뜩한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토록 데미안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지만 자신이 진정 찾는 것은 데미안일 수밖에 없었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라는 매개자를 통해 데미안으로 가는 길을 우회적으로 깨닫게 된다. 싱클레어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 기꺼이 ‘학교 밖의 스승’이 되어준 피스토리우스는 문사철은 물론 예술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걸출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개척하는 능력, 사랑과 신앙의 새로운 상징을 창조하는 능력, 단지 ‘지식’의 습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운명과 우주 자체를 투시하는 직관이 결여되어 있었다. 데미안에게는 있지만 피스토리우스에게는 없는 것을 깨닫기 위해, 싱클레어에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스승은 데미안이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불현듯 나타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피스토리우스가 ‘도서관’ 속의 지식을 가르쳐주었다면, 데미안은 오직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는 ‘길 위의 지식’을 가르쳐준다. 운명을 긍정하고 운명의 장단에 맞추어 인생이라는 춤을 출 수 있는 힘, 더불어 때로는 운명과 대결할 수 있는 힘까지도.
피스토리우스는 너무도 편안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 속에 머물렀다. (…) 그의 사랑은 이미 지구가 보았던 형상들에 매여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것은 새롭고도 달라야 한다는 것, 새 땅에서 솟아야지 수집되거나 도서관에서 길어내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의 직분은 어쩌면, 나에게 해주었듯이, 인간이 그 자신에게로 이르도록 돕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들어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것, 새로운 신들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그의 직분이 아니었다. (…) 새로운 신들을 원한다는 것은 틀렸다. 세계에다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헤세, 전영애 옮김, 『데미안』, 민음사, 1997, 170~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