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vs <호밀밭의 파수꾼> ③
싱클레어 vs 홀든: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카인이 고귀한 인간이고, 아벨이 비겁자라구! 카인의 표적이 표창이라구!
그건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신성모독이고 극악무도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 가버리신 거야?
-헤세, 『데미안』 중에서
성서에서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좋아한 사람은 무덤 속에 살면서 돌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살아가는 미친 사람이다. 그 가련한 사람이 열두 제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 (…) 난 예수님이 유다를 지옥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천 달러라도 걸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내가 천 달러를 가지고 있을 때 얘기지만 말이다. 다른 제자들이었다면 누구라도 유다를 지옥으로 보냈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싱클레어와 홀든은 모두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특히 원조 모범생이었던 싱클레어는 교양과 예절과 학문과 예술의 향취가 물씬 나는 집안에서 아무런 정신적 결핍 없이 살아왔고, 홀든 또한 눈에 띄는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문제아였던 것은 아니었으며 유난히 작문을 잘 하는 감수성 여린 소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에게 삶 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싱클레어에게는 사악한 불량배 크로머가 나타나 ‘돈’을 요구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홀든이 더없이 사랑했던 동생 앨리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평화롭고 그지없었던 어린 시절의 마지막 페이지가 그렇게 처참하게 끝나버렸다.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님의 세계’와 ‘나의 세계’, 그리고 ‘평화로운 가정’과 ‘험난한 세상’ 사이의 경계가 홍해처럼 선명하게 갈라지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결코 나의 힘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소외감을 느끼고, 평화로운 집 밖으로만 나가면 언제든 쉽게 폭력과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불량배에게 매일 협박을 당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극심한 대인기피 증세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전혀 알지 못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양가감정을 느낀다. 그래, 나도 부모님들이 전혀 모르는 나만의 세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모르겠냐고, 내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지를. 홀든은 동생의 죽음 이후 점점 약에 의존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미처 동생의 죽음을 마음 놓고 슬퍼할 기회조차도 갖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아프게 ‘부모님의 세계’와 ‘나만의 세계’ 사이의 분리를, ‘가정’과 ‘바깥세상’ 사이의 칼날 같은 경계를 경험한다.
사실 이럴 때 가장 절실한 것은 친구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수직적인’ 충고보다는, ‘나도 너처럼 힘들고 아파’라는 뉘앙스로 다가오는 친구의 ‘수평적인’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크로머의 교활한 협박과 끈질긴 감시에 지칠 대로 지친 싱클레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혼자 끌어안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싱클레어에게 다가온 친구는 바로 데미안이었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워서 도저히 동년배로 보이지 않는 데미안. 학생이라기보다는 수도원의 구도자 같은 느낌을 주는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미처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내면을 응시하게 도와준다. 넌 지금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 두려움은 누군가에게 너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기 때문이라고. 너의 약점을 상대방은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약점을 이용하는 상대방은 결코 너를 지배할 자격이 없는 악당이라고. 그 두려움을 네가 먼저 떨쳐버려야만 한다고. 그게 안 된다면 그 녀석을 아예 때려 죽여버리라고. 만약 네가 그 녀석을 죽일 거라면 나도 널 도울 거라고.
심약한 모범생이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강력한 메시지에 전율을 느끼고,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알게 된다. 내가 크로머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나는 영원히 그의 노예가 될 수도 있겠구나. 어머니 앞에서 고해를 한다면 언제든 나를 구해주시겠지만, 결코 어머니의 치마폭에 숨어버리기는 싫은데. 그런데 이 사람, 데미안은 누굴까. 내가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내 마음의 비밀을 속속들이 읽어버리다니.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구나. 말하지 않아도 내 표정을 읽어내는 이 친구가 있다면, 나는 더 이상 크로머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드디어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의 감시체제에서 벗어난 싱클레어. 그는 이제야 데미안의 사고방식이 보통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데미안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을 의심한다. 그는 단지 의심할 뿐 아니라 공인된 진리의 허점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 진리가 발 딛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주춧돌을 기어코 부숴버리고 만다. 싱클레어에게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는 바로 카인과 아벨에 대한 데미안의 독특한 해석이었다. 데미안에 따르면 카인은 결코 ‘사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카인이 받은 형벌은 그가 ‘우월한 인간’이기 때문에 견뎌야 했던 뭇 사람들의 질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아벨의 세계’가 약속하는 따스하고 선량하고 수동적인 세계를 믿어왔던 싱클레어는 ‘카인의 세계’가 유혹하는 추악하고 잔혹하며 폭력적인 세계의 매력에 깊이 빨려든다. 데미안은 악마의 유혹과 천사의 미소를 모두 가진 야누스적 존재였던 것이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 하나를 쳐죽였어. 그것이 정말 형제였는지 그거야 의심할 여지가 있지. 정말 형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결국 모든 인간이 형제잖니. 그러니까 어떤 강한 사람이 어떤 약한 사람 하나를 때려죽인 거야. 어쩌면 그건 영웅적 행위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 어쨌든 다른 약한 사람들이 이제 잔뜩 겁이 난 거야. 그들은 몹시 탄식을 했지. 그런데 “왜 너희들도 그 사람을 그냥 쳐죽이지 않는 거지”라고 누가 물으면 그들은 “우리가 겁쟁이이기 때문이죠”라고 말하지 않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표적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느님에 그에게 그려준 겁니다!”라고 말했지. 대략 그런 식으로 그 사기는 이루어졌을 게 틀림없어.
-헤세, 『데미안』, 민음사, 1997, 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