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vs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③
개츠비 vs 블랑시: 환상의 거품으로 축조된 현실
개츠비의 과시적인 저택과 화려한 파티들은 데이지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정교하게 고안되어 전시된 광고다. 그가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확신, 그가 예전에 있던 바로 그런 식으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 등은 바로 광고 문화의 덕택이다.
―토니 태너
자신의 스타일이나 캐릭터는 물론, 출생의 기원까지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출생부터 현재까지, 가족부터 주변 사람들까지,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의 이미지를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 한 가문의 자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손이 되는 사람들. 개츠비 또한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진짜 부모’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가난하고 무능한 부모, 자신의 경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부모를, 개츠비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가치의 서열에 따라 자신의 이상적 이미지를 구축하고, 자신의 삶을 낱낱이 해체하여 철저히 DIY식으로 재조립한다. 그 조작된 이미지야말로 그의 진정한 정체성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그토록 원하던 것을 집에서 찾게 된다는 말들을 한다. 그것은 오디세우스처럼 집에 사랑스러운 페넬로페가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에게나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엄청난 재산까지 축적했지만, 개츠비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그가 찾는 이상향은 오직 먼 옛날, 재산도 명예도 없었지만 오직 벌거벗은 꿈과 낭만이 있었던, 아득한 과거 속에 있었다.
개츠비는 그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탈환하기 위해, 벤자민 프랭클린 식의 ‘부자 되는 비법’의 교리에 충실한, 자신의 원래 성격과는 전혀 딴판인 CEO형 인간이 되는 것조차 불사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물불 가리지 않고 번 돈으로, 전혀 자본가답지 않은 감상주의를 실천한다. 개츠비가 찾는 낭만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문장처럼, 영원히 전해지지 않을 편지처럼, 그의 ‘현실’ 속에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꿈이었다. 자신의 ‘진짜 라이프스토리’가 밝혀지지 않길 원하는 개츠비의 불안을 닉은 정확히 읽어낸다. 자신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을 잠재우고 싶은 개츠비는 자신의 과거를 화려하게 윤색하기 위해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 중서부의 부유한 집안 출신입니다. 지금은 다 돌아가셨지요. 미국에서 자랐지만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중서부의 어느 쪽이지요?” 내가 무심코 물었다. “샌프란시스코입니다.” “알겠어요.” “가족이 모두 죽어서 내가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았습니다. (……) 그 뒤 파리, 베네치아, 로마 등 유럽의 모든 수도에서 인도의 젊은 영주처럼 살았습니다. 보석들, 주로 루비를 수집하고, 맹수 사냥을 하고, 그림도 조금 그렸지요. 나 자신만을 위한 일들이었지요. 그러면서 오래전에 겪었던 아주 슬픈 일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 그러다 전쟁이 일어났어요, 친구. 커다란 구원이었죠. 나는 죽으려고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법에 걸린 듯이 게속 살아남았죠.”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150~151쪽.
샌프란시스코가 미국의 중서부에 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아무렇지 않게 토해내는 개츠비는 자신이 옥스퍼드 출신의 재원이며 유서 깊은 가문의 상속남이라는 이야기를 날조한다. 닉은 십여 권의 잡지를 급하게 훑어보는 듯한, 마치 진짜 인간이 아니라 조작된 캐릭터처럼 엉성하고 허황된 개츠비의 거짓말을 금세 알아차린다. 하지만 닉은 개츠비에 대한 ‘불신’이 개츠비에 대한 ‘매혹’ 속에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닉은 개츠비의 거짓말조차 은폐할 수 없는, 개츠비의 순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블랑시 또한 스스로의 내면에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과거의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자기 안에 구현된 완벽한 아름다움의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어떠한 자극도 참아내기 어렵다. 스탠리의 친구 미치와 데이트를 시작한 블랑시. 그녀는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낭만적인 데이트의 환상을 충족하기 위해, 평범한 노동자로 살아온 미치에게 ‘과도한 상상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블랑시: 우리는 보헤미안이 되는 거예요. 파리의 센 강 왼편 언덕에 있는 자그마한 예술가들의 카페에 앉아 있는 척하는 거예요! (블랑시는 양초 토막에 불을 붙여 병에다 꽂는다.) 주 쉬 라 담 오 카멜리야! 부제트 아르망!(나는 춘희! 당신은 아르망!) 프랑스어 아세요?
미치: (침울하게) 아니요. 아니요, 저는…….
블랑시: 불레 부 쿠세 아베크 무아 스 수아르? 부 느 콩프르네파? 아, 켈 도마주!(오늘 밤 같이 보내지 않겠어요? 이해 못 하나요? 아, 이런!) 내 말은 정말 잘 되었다는 거예요.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2007, 95쪽.
그녀는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라 트라비아타〉의 ‘춘희’가 되고 싶고, 지금 그녀 앞에 앉아 있는 평범한 노동자 미치를 귀족의 자제 ‘아르망’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녀는 도시 빈민가의 룸펜으로 만족하기에는 스스로도 안타까울 정도로 방대한 지식과 예술적 감식안을 지녔다. 그녀는 유창한 프랑스어와 어디서든 쉽게 달달 외우는 명작시와 세련된 패션감각을 ‘써먹을 데’가 없다. 그녀의 ‘좋았던 옛날’은 오직 이제는 사라져버린 옛집 ‘벨 리브’에만 살아 있는 허상이다.
그녀는 이런 낭만적 상상 속에서만 순도 99.99퍼센트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에겐 현실이란, 삶이란, 과거란, 모두 ‘악몽’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꿈꾸어온 예술과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낭만적 판타지 속에서만 그녀는 비로소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