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축제와 같다. 어떤 이는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오고, 어떤 이는 장사를 하러 오지만,
최상의 사람들은 관객으로 온다.
- 피타고라스
잘 잊어버려야만 비로소 잘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다. 망각은 우선 아픈 상실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가끔 형편없는 내 기억력에 절망할 때도 있다. 오래 전에 사서 밑줄까지 좍좍 그어가며 읽은 책을 또 한 번 ‘처음인 양’ 설레는 맘으로 구입했을 때다. 그리하여 내 책장에는 두 권씩, 심지어 세 권씩(!) 꽂혀 있는 똑같은 책들이 적지 않다. 책을 ‘읽었다’는 것은 기억나는데 책을 ‘샀다’는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글픈 기억의 풍화 작용이 반드시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특히 내가 두 번 세 번 처음인 양 구입한 책들이 명불허전의 고전일 경우, 은근히 그 망각의 효과(?)를 즐길 때도 있다. 허겁지겁 각종 필요를 핑계로 새 책을 구입하지만, 결국 내 기억의 창고에서 ‘헌 책’을 발견하게 되고, 빛바랜 헌 책에 끼적인 옛 메모를 바라보며 행복한 ‘기억의 시차’를 경험하는 것이다. 아, 그 옛날엔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때로는 기특하고 때로는 한심해지는 이 경험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완벽하게 분리되는 순간이다.
고전 문학 속의 캐릭터들은 ‘독서의 시차’를 통해 매번 다른 기억의 풍경을 토해낸다. 사춘기에 만난 베르테르와 30대에 다시 만난 베르테르가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어린 시절 그토록 ‘나쁜 놈’으로 보였던 후크 선장이나 메피스토펠레스가 지금은 한없이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각과 회상을 반복하던 고전 속의 캐릭터들은 기억의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훨씬 풍요롭고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이러한 독서의 시차야말로 고전 읽기의 묘미다. 그토록 열심히 읽었던 것을 그토록 깡그리 잊어버리다니.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되돌아온 고전’은 더욱 아련한 매혹을 뿜어낸다. 워낙 감쪽같이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현듯 찾아온 ‘회상의 기쁨’은 더욱 커지는 셈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잃어버린 기억 속의 캐릭터’와 ‘다시 찾은 고전 속의 캐릭터’는 흥미로운 수다의 향연을 펼치기 시작한다. 고전 속의 인물들은 내 안에서 서로 아무 때나 교신하여 자기들끼리 흥겨운 의미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곤 한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 그 옛날 기억의 냉동 창고 저 아래쪽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주인공들의 얼어붙은 삶이 내 안에서 천천히 해동 모드에 진입한다. 그들은 천천히 얼어붙은 의미의 육체를 녹여내며 자기들끼리 분주하게 내 인생의 종합검진을 시작한다. 그들은 그렇게 내 삶을 숙주로 삼아 아름다운 의미의 세포분열을 시작한다. 때로는 고전 속의 캐릭터가 살았던 ‘대단한 삶’에 비해 내 삶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아픔은 금세 지나간다. 아픔 뒤에 남는 것은 그들 삶의 ‘관객’이 될 수 있는, 행복한 관조자의 조용한 기쁨이다. 그들의 삶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만이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 그들의 삶은 우리, 관객들의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만, ‘고정된 해석’의 암반을 깨고 새로운 의미의 토양 위로 부활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발짝 물러서 있기에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이 수많은 관객들 중에서도 조금 수다스러운(?) 편에 속하는 나는, 내 마음 속에서 틈날 때마다 비밀 미팅을 진행 중인 고전 속 캐릭터들의 커플매니저가 되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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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자음과모음>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시네필 다이어리』,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