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립도서관(1953). 사진=경주시대 |
지난 9월 9일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경주시립도서관 개관 70주년 행사가 열렸다. 언뜻 보기에는 여느 도서관의 개관 기념행사와 달라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날의 70주년 개관 기념행사는 특별했다.
경주시립도서관은 1953년 경주읍립도서관으로 처음 개관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공공도서관 1,236개관2022년 말 기준 가운데 무려 6번째로 오래된 도서관이다. 경주시립도서관보다 먼저 개관한 도서관은 일제강점기인 1901년에서 1922년 사이에 큰 도시에서 개관한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1901, 대구광역시립중앙도서관1919, 서울특별시교육청종로도서관1920, 인천광역시미추홀도서관과 서울특별시교육청남산도서관1922 등 5곳뿐이다. 그렇다면 경주시립도서관은 식민지 해방 이후 처음으로 개관한 도서관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 그 의미가 크다. 거기에 더해서 이 도서관은 지방자치단체가 건립한 것이 아니라 도서관운동가 엄대섭 선생 개인의 노력으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해진다.
엄대섭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도서관을 세워 민중들이 지식으로 깨우쳐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한창 한국전쟁 중인 1951년 6월 당시 울산에서 사립 도서관을 개관한 도서관운동가였다. 사립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계속해서 운영하기 어려워 자기의 도서관을 울산읍에 기증해 공립으로 운영하기를 바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서관을 접게 되었다. 그러다가 당시 경주읍에서 엄대섭 선생의 뜻을 받아들이자 가지고 있던 도서 2천 여권과 각종 장비 등을 경주읍에 기증하고 자신은 무보수촉탁 관장이 되기로 하고 1953년 7월 1일 읍사무소 회의실 공간에 경주읍립도서관을 개관하게 된 것이다. 2년 후 경주시립도서관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당시 큰 도시에도 공공도서관이 없던 시대에 한 개인의 노력과 기부로 경주읍에 도서관이 생긴 것은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엄 선생께서는 도서관뿐 아니라 경주시 탑마을에 첫 번째 마을문고를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전국에 수많은 마을문고를 세우는 역사적인 운동을 시작하시기도 했다.
엄대섭 선생님과 경주도서관 이야기가 오늘날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80년대 엄 선생님이 ‘대한도서관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하던 시기를 함께했던 정선애 씨가 꾸준히 엄 선생님에 대한 기록과 기억을 정리하고 있던 차에, 경주시에서 새마을문고 50년 기념으로 발행한 책에서 엄대섭 선생님과 경주도서관 이야기를 발견한 다음 경주도서관에 대해 적극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경주도서관에 대해 다양한 자료와 관련 인사들과의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2022년 『도서관운동가 엄대섭의 발자취를 찾아서; 경주도서관 이야기』라는 책으로 정리해 출간했다. 또한 정선애 씨는 책 출간을 계기로 2023년 1월부터 6월까지 경주시 지역언론인 「경주시대」에 경주도서관과 엄대섭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그런 중에 도서관한국도서관사연구회도 3월 중 몇몇 회원들이 함께 경주시 도서관 역사 탐방을 나섰다. 이때 경주시립도서관을 방문해 도서관이 지나온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러한 역사를 잘 갈무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결과일까? 다행스럽게도 경주시와 도서관이 이번 개관 70주년 행사에서 1953년 엄대섭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도서관 역사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엄대섭. 사진 = 『이런 사람 있었네』(이용남, 2013) |
경주시립도서관 개관 70주년 행사에서 경주도서관 역사의 초석을 놓은 고 엄대섭 선생님과 귀중한 도서관 역사 자료를 시에 기증한 김윤근 선생님께 경주시장주낙영이 감사패를 드렸다. 또한 도서관 앞뜰에 ‘간송 엄대섭 선생 기념비’를 세웠다. 아울러 처음 경주읍립도서관이 있었던 읍사무소 옛터에는 ‘최초 경주읍립도서관 터현 경주시립도서관 전신’ 표지석을, 첫 번째 마을문고가 설치되었던 탑마을에는 ‘마을문고 발상지경주 탑동 543 일원’ 표지석을 각각 설치했다. 도서관 부문에 있어 이렇게 여럿의 기념비나 표지석이 세워진 것은 드문 일이다. 1920년 설립되어 100년의 역사를 넘어선 서울특별시교육청종로도서관도 100주년이던 2020년부터 기념 표지석 설치를 추진했다가, 2021년 12월에야 처음으로 서울특별시문화재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도서관의 전신인 옛 경성도서관 터에 기념표석을 설치한 적이 있다. 그러니 한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여럿의 도서관 관련 기념표석을 한꺼번에 설치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주에서 경주도서관 역사에 대해 주목하고 구체적으로 이를 되살려 기억하고 기리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책과 기사 등으로 경주도서관 이야기를 발굴하고 알리는데 애쓴 정선애 씨와 함께 1950년부터 1980년대까지 경주도서관을 이용하면서 가지고 있던 경주도서관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도서관에 기증한 김윤근 선생님, 이번 기회에 오롯이 도서관의 역사를 잘 담아낸 경주시립도서관 최자숙 관장과 직원, 엄대섭 선생님의 모든 것을 정리해 기록하고 기억하게 해 주신 이용남 선생님, 마을문고의 정신을 이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새마을문고 경주시지부 등 많은 분들의 열정과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다. 무척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도서관사연구회도 조금이나마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 다른 지역의 공공도서관들도 이번 경주시와 경주시립도서관처럼 자신들의 역사를 당당하게 말하고 시민들에게 알리는 다양한 노력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
마침 경주시는 오랜 역사 문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현대적 감각이 더해져 힙한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경주시에서도 도서관 여행을 한번 해 보시길 권한다.
*참고
· 「경주시대」 [경주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경주도서관 이야기1~11
★「한국독서교육신문」에 실린 글입니다.